초여름, 열대야가 시작되기 전 더위는 염치가 좀 있었다
후안무치 달아오르는 한여름 더위와는 달리 저녁 무렵이면 제법 소슬한 바람이 불었다
동구 밖, 마을 어귀의 커다란 나무 잎들이 흔들리며 바람은 시작된다
더위를 피해 실내에 있던 아이들이 몰려나오며 골목이 왁자지껄 시끄러워진다.
사방 치기, 고무줄놀이, 자치기, 숨바꼭질,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셔츠 소매를 반쯤 거둬 올린 아버지들의 귀가가 시작되면
식사 준비를 하는 여인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바빠졌다.
부지런한 며느리들은 어둠이 내리기 전, 하늘이 붉게 물들 때 식사 준비를 끝내고
대부분 저녁 식사는 마당에 있는 평상에 차려졌다.
설핏 해가 기우는, 노을빛 고운 초여름 저녁,
지금은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풍경이다,
그때같이 놀던 친구들도 지금 나처럼 어디선가 늙어 가고 있겠지,
나는 그리 놀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편이었다
편을 나누는 놀이에서는 누구의 편도 아닌 깍두기였다
이쪽 저쪽을 왔다 갔다 해도 내 차례는 가장 짧았다
친구들은 내가 자기편이 되어 주기를 원치 않았지만 놀이에서 소외시키지는 않았다
금방 놀이에 지고 마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닌 우리 편을 만들어 주었다.
놀이를 잘하지 못해도 신이 나던 시절이었다
골목의 아이들은 퇴근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거나
골목에 메아리치는 엄마들의 부름에 길게 대답하며 하나 둘 흩어졌다
어둠이 내리기 전 골목은 조용해졌고
평상 위의 두레반에서 가족들이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붉은 노을빛이 선연할 무렵, 밥상에는 호박과 감자를 넣은 된장찌개, 삶은 호박잎 쌈이나 상추쌈,
풋고추, 가지나물 집집마다 식단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쩌다 별식이라도 있는 날에는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나누어 먹었고
돌아오는 그릇에는 무언가 조금씩 들어 있었다
찐 감자나 옥수수, 노랗게 익은 참외 같은 것들이다
먹거리가 좋아진 요즘에는 맛있는 별식이 지천이건만
지금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그때 엄마가 만들어 주신 풋고추찜이나 부추전, 콩자반 같은 것들이다
엄마는 콩자반을 유난히 윤기나게 잘 만드셨다
설탕이 귀하던 시대이니 다른 집 콩자반은 찝찔했지만
설탕을 넉넉히 사용한 엄마의 콩자반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달콤해서
도시락 반찬으로 가져가면 아이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어머니는 감자조림도 잘 만드셨다
고추장 조림이냐 간장조림이냐에 따라 같은 감자지만 맛이 다르고
간장 조림에 유난히 윤기가 흘렀다
아마 설탕의 마법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70 평생 동안 가장 맛있는 식사가 그때 먹던 된장찌개가 아닐까?
요즘사람들이 숲세권이니, 공세권이니, 한강 뷰니, 저마다 아름다운 풍광들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때 골목 어귀에 지는 석양처럼 고운 빛을 알지 못한다
골목에 아이들이 사라진 것처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여름 초입부터 열대야가 시작된 올여름에는 그나마 초 저녁의 소슬바람도 불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신 첫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