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를 하고 있다.
나이 들어 하는 공부가 새삼스럽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먼 길을 돌아 고향 집을 찾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어릴 적 나는 글 잘 쓰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도내 백일장을 휩쓸던 기억이 있다
장원을 한 어느 해에는 교장 선생님이 덜컹거리는 트럭에 태워 카퍼레이드를 시켜 주기도 했다
차가 귀하던 시절이니 동네가 떠들썩해지는 호사였다
중학교 애 입학한 후부터 나는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다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나는 우리 고향에서 일류 여학교에 우수한 입학성적으로 합격했으니
입학식 날 입학생 명단에는 내가 없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고 대중교통도 만만치 않던 때이다
교복을 차려 입고 입학식에 참석했던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울며불며 집까지 걸어가는 일밖에는 없었다
그때 우리 엄마는 집에서 먼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퇴근은 해가 저물고 난 늦은 시간이었다
늦게 집에 도착한 엄마는 내 말을 듣고 나보다 더 놀라셨다
안색이 창백해지시며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무언가를 중얼거리셨다
전후 가난한 시절이었다
아버지 9남매 중에는 전쟁을 겪으며 돌아가신 분도 있고 부상을 당하신 분도 있었다
청주에 나와 살며 두 분이 교사 생활을 하셨으니 우리 집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사촌들이 늘 한두 명 있었다
아버지는 어려운 조카들을 돌보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성정을 아는 어머니는 당신이 내 입학금을 손수 마련하여 아버지께 맡기셨지만
아버지는 조카들의 학비로 그 돈을 먼저 쓰고 말았다.
입학 전까지는 마련해 넣으려는 계획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입학 취소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날 아버지를 바라보던 체념과 분노로 싸늘해진 엄마의 눈빛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행히 추가 납기일에 맞춰 입학금을 다시 마련해 넣었고
나는 입학식이 끝난 후 일주일여 만에 학교에 등교하게 되었다
교과서도 부족한 시절이었으니 한 달쯤 나는 교과서도 없이 학교에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에서 우수학생들만 모인 중학교는 초등학교와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명랑하고 자신만만하던 나는 의기소침하고 그저 그런 평범한 중학생이 되고 말았다
나는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
글 잘 쓰는 아이라는 말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안 써서 그렇지 쓰기만 하면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다며 버티었다.
일기조차 쓸 수 없었다.
당시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글쓰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 않았다
무심한 세월이 흘렀고 이따금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올랐지만
삶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에 매여야 하는 일상이었다
의무와 책임이 먼저였지만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바쁘게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허전함을 메울 수는 없었다
아이가 독립을 선언하며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자 나는 허전함의 정체와 마주했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60년 세월이 흘렀어도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안 써서 그렇지 쓰기만 하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혼자 전전긍긍 글쓰기 책을 사다 놓고 읽어 보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글이 그냥 써지지는 않았다
"이젠 늦었다' 선언을 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울고 싶도록 하고 싶은 일이었구나' 깨달았다
잘 써야 하는 부담감을 내려놓기로 했다
붙들고 있던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자, 나는 글 잘 쓰는 아이가 아니라 글쓰기 공부를 하는 연습생이다 '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다.
재미로 운영하던 블로그 주제를 문학으로 바꿨다
'글쓰기 초보에요'를 외치는 내게 블로그 이웃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나는 글쓰기 연습생이 되었다
'야구선수가 한 번의 홈런을 치기 위해 수백 개의 공을 쳐내야 하듯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써야 한다'
'유명 작가들도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 한다'라는 말들에 위로를 받았다
글쓰기 연습은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잘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다.
이젠 글쓰기를 위해 책상 앞에 앉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글 쓰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먼 길에서 돌아와 동구 밖 느티나무를 발견한 기쁨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아이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