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80부터

by 우선열

인생은 80부터라는 말에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나이 70이 훌쩍 넘었건만 노인이라는 말에 샐쭉해지는데

인생이 80부터 라면 아직 한참 자라는 나이이다

흐뭇할 만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철에서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건만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균형을 잡지 못하니 이젠 타기 전부터 앉을 자리를 찾느라 눈이 번득인다

몸은 늙는데 마음은 늙지 않는다더니 전철을 타면 먼저 앉을 자리를 찾다가도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하는 말을 들으면 서운하다

'내가 왜 제 할머니야" 혼잣말을 한다.

몸은 이렇게 나이에 반응하건만 마음은 여전히 낙랑 18세이다

어쩌다 거울을 보면 나타나는 낯 선 할머니가 싫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긴 하지만 내가 벌써 저리 늙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철을 타면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노인들이 자리를 양보한다


얼마 전 일이다

젊은이들이 입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이 찢어지게 흉보다가

최신 트렌드라는 후배의 꼬임에 빠져 조금 찢어진 청바지 하나를 구입했다

얌전하게 S 자 커브로 터진 자리라 맨살이 보이지는 않고 마치 무늬 같아 보이는 청바지이다

"언니, 10살은 젊어 보여" 후배의 말을 믿고 길을 나섰다

양재천으로 향하는 산책길이었다

아직 남은 햇살이 뜨거운 여름 저녁 무렵이다

산책길이건만 양복을 차려입은 초로의 노인네가 다가왔다

"어르신, 이 길로 가면 양재천입니까?"

뒤를 돌아 봐도 아무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어르신'이라니 가당치 않아 보였다

모르는척하고 싶었지만 산책길이 한산했다

모른척할 수 없었다.

"네 그길로 쭉 가세요" 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청바지를 벗어던졌다.

모든 게 청바지 탓인 것만 같았다

내게 '어르신' 한 사람은 적어도 60대 후반은 된 것 같아 보였다

'산책길에 양복 차려입은 꼰대가 누구더러 어르신이래? '혼자 씩씩거린다

"뭘 그래, 어르신이라며 존칭을 써줬잖아, 버릇없거나 건방진 태도보다 훨씬 낫지"

친구의 말이 별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말도 맞기는 하다

아줌마 하면서 얕잡아 보이는 말투를 썼더라면 더 기분 나빴을 것이다.

청바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10살쯤 어려 보인다는 말을 믿은 게 잘못이다

65세 국가 공인 어르신이 될 때에도 남의 일 같기만 하더니 70세부터는 몸이 늙는다.

균형잡기가 힘들어 자주 넘어지고 행동이 굼떠지니 신체 나이를 의식하게 된다

걷는 속도가 노화의 척도라니 노화를 인정해야만 한다

100세 시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이 까마득해진다


백세시대는 젊은 시절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늙은이로 살아야 할 시간이 덤으로 얹힌 것만 같다

열정과 패기가 넘치던 젊은 시절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의무와 책임,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다


의기소침해지려는데 인생은 80부터라 하지 않는가

덤처럼 즐거울 수 있는 인생이다

사느라 바빴던 젊은 시절에 누릴 수 없는 여유이다

살아오면서 쌓인 지혜가 빛을 발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지금의 자유는 부족한 대로 젊은 시절을 살아낸 대가이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누려야 한다


아직 초보 할머니를 벗어나지 못해 젊음을 부러워했지만

이젠 나이 듦을 인정하고 제대로 누려 보련다

인생은 8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나이 80,

지금부터 누리는 삶이 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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