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단순한 질문 같지만 막상 대답하려면 당혹스럽다. 지갑의 본래 용도는 돈을 수납하는 데 있었다. 장지갑이니 반지갑이니 하는 모양에 차이가 있을 뿐 지갑은 돈 주머니였고 두둑한 지갑은 부의 상징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지갑의 속사정은 달라졌다. 이제는 돈다발 대신 카드 몇 장이면 웬만한 생활이 가능하다. 카드는 돈을 대신할 뿐 아니라 신분을 증명하기도 하고, 특정한 장소와 권한을 열어 주는 열쇠 구실도 한다. 한 장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여러 장의 카드를 지니고 다닌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두둑한 지폐 뭉치를 지갑속에 넣고 다니듯이 ,
카드가 지갑을 점령하면서 가장 중요해진 것은 신분증이다. 주민등록증 한 장이면 나를 증명하기 충분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사원증, 공무원증, 자격증, 회원증 등 저마다의 역할과 소속을 드러내는 카드들을 더한다. 도서관 출입증, 복지관 회원증, 협회 회원증까지 챙기다 보면 지갑은 금새 불룩해진다. 복잡해진 세상만큼 ‘나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진 까닭이다.
예전에는 지갑 속 사진도 중요한 자리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담아 다니며 꺼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지금은 휴대폰 앨범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진뿐 아니라 카드마저 휴대폰 속으로 들어가는 세상이니, 지갑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문제는 나 같은 사람이다. IT 기계에 능숙하지 못한 세대는 여전히 지갑과 휴대폰 두 개를 함께 들고 다녀야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카드 수납형 휴대폰 케이스다. 충격에 약한 휴대폰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카드 몇 장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지하철 패스권이나 자주 쓰는 카드, 신분증 하나 정도를 넣으면 가까운 외출에는 편리하다. 그러나 그 안에 모든 것을 수납하기는 어렵다. 결국 나는 휴대폰 케이스와 지갑을 나누어 들고 다닌다.
그만큼 카드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트나 백화점 카드, 출입증, 각종 회원증이 빼곡하다. 없어도 당장은 큰 불편이 없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챙기지 않을 수 없다. 비상용으로 넣어둔 카드들이 지갑을 묵직하게 한다.
가장 특별한 것은 연명치료 의향서 카드다. 지갑 속에서 좀처럼 꺼낼 일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단 한 번 꼭 쓰게 될 카드.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남겨 놓을 마지막 의사 표현이자, 나를 증명하는 최종의 신분증일지 모른다.
지갑은 이제 단순히 돈을 넣어 다니는 물건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각자의 삶의 궤적이 스며 있다. 두둑한 지갑을 자랑하던 시절에서, 카드를 수납하는 지갑으로, 다시 휴대폰 속으로 기능이 흡수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지갑 속에는 나를 증명하고 나를 이야기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
지갑을 열어 보면, 그 사람의 세월과 생활, 그리고 마음속 안쪽까지도 엿볼 수 있는 법이다. 지갑 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들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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