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음식

-떠나간 친구를 생각하며-

by 우선열


수확의 계절 가을, 오곡백과가 무르익는다. 시장에 가면 온갖 제철 과일과 먹음직스러운 농산물들이 유혹한다. 짐승과 물고기들도 여름 더위를 벗어나 겨울 채비를 하느라 윤기 자르르 흐르는 통통한 몸매이다. 무엇을 먹어도 '잘 먹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풍성한 먹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가을에는 특별한 요리법이 필요 없다. 재료만 잘 선택하면 최소한의 가공만으로도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된다. 이맘때가 되면 "요즘은 집밥이 제일 맛있어" 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친구는 암 투병 중이었고, 부인은 정성을 다해 병시중을 했다. 가장 신경 쓴 건 먹거리였다. 입맛을 잃어버린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음식 솜씨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빼어났으니, 그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식재료를 구하는 일이었다. '신선한 최고급품'이라는 원칙을 세우자 외식을 마다하지 않던 가족들마저 "집 밥이 더 맛있어" 하게 되었다. 풍성하고 싱싱한 제철 재료들이 가득한 가을 시장에 가면 그 친구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선우님, 나 수서야. 두어 시간 차 시간이 남았어.' 목포에서 SRT를 이용해 병원에 다니던 그는 병원 치료가 일찍 끝나면 그렇게 전화를 걸어왔다. 대부분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너무 멀리 있거나 부득이한 일일 경우 보지 못하기도 했다. 투병 중인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명랑했다. "나 환자야, 나를 먼저 챙겨야지"라고 너스레를 떨면, "그래, 나일론 환자! 그런 환자 나도 하겠다"라고 내가 대꾸할 수 있을 만큼 스스럼없었다.
"진짜야. 이번엔 새로 수입한 약이 잘 맞아서 살아났거든. 약에 저항력이 약해지면 다시 새로운 약으로 바꿔야 해. 그동안 새로운 약이 수입되지 않으면 지고 마는 거지. 내가 새로운 약 시험 상대인 셈이야. 지금까지는 약이 잘 맞아서 버텨 올 수 있었고."
"그러니까 잘 먹어. 병을 이겨 나가면 되잖아. 세상 산해진미 다 만들어내는 솜씨 있는 부인이 있는데 무슨 엄살이야."
"그게 말이야. 나도 음식은 솜씨인 줄 알았거든. 솜씨보다는 재료가 좋아야 하나 봐. 요즘 마누라는 요리할 때 가장 최상급 재료만 써. 일류 요릿집 음식값보다 재료 구입비가 더 많이 들어간다니까. 음식이 확실히 맛있어졌어."
"마누라 자랑도 여러 가지네. 음식 솜씨뿐 아니라 정성도 그만이라는 거잖아."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누면서 우리는 아픈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나빠진 병세에 침울해지면 그가 하던 말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놨어. 지금은 즐기면 되는 여분의 삶이야. 시한부도 나쁘지 않네."
의사가 말한 수명 시간을 2년 정도 넘기고 그는 2020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예고된 이별이라 해도 이별은 쉽지 않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의 블로그 'm42 컬렉터'에 들른다. 지금은 정지되어 있는 블로그지만 내 마음속에는 살아있다.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시한부 삶도 나쁘지 않아" 하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음식은 재료 맛이야" 하던 목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 떠나간 친구가 더욱 그리워진다.

'밥 한번 먹자' 말만 해버린 친구는 없나 돌아본다. 더 늦기 전에 오곡백과 풍성한 이 가을에 만나 볼 일이다. 재료가 좋으면 최소한의 가공으로도 음식은 충분히 맛있으니까. 더 늦기 전에, 풍성한 가을 밥상에서 마주 앉을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재료가 좋으면, 최소한의 손길로도 음식은 충분히 맛있다. 마음도, 사람 사이의 정(情)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