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엔

by 우선열


늦더위의 기세에 눌려 올 듯 말 듯 머뭇거리던 가을이 한달음에 달려오는가 싶더니, 벌써 떠날 채비를 하는 듯합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거리엔 겨울의 상징인 패딩이 활보하고, 가을의 멋이라던 바바리는 아직 명함도 내밀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옷으로 무장할 수 있는 우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하늘만 믿고 살아가는 생물들은 난감하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련을 못 버리고 한두 송이 피고 지던 목백일홍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었고,
늦게 핀 가을꽃들은 이미 기세가 꺾였습니다.
늦가을까지 오래 피던 국화마저 필 듯 말 듯 하다가 겨우 피더니, 벌써 져야 하나 눈치를 보는 듯 처량해 보입니다.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하던 고고한 기세도 추위 앞에서는 속수무책, 초라한 행색입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던 단풍들도 제 색을 내기 전에 낙엽 되어 뒹굴고 있습니다.
플라타너스의 커다란 잎은 단풍보다 낙엽이 먼저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유난히 고운 노란 은행잎이 푸르둥둥한 채 낙엽 되어 떨어지는 모습은 안타깝다기보다 민망한 느낌입니다.
도심의 가로수가 이럴진대, 숲속 나무들은 또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까요?
철새들이나 겨울잠을 자야 하는 동물들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 어리둥절할 것만 같습니다.

나무나 짐승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자연을 낭비하고 혹사시킨 사람들 때문입니다.
쓰다 버린 물자들로 산야는 쓰레기로 덮이고, 에너지 낭비로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너무 빨라 계절조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로’라던가요?
희희낙락 누리던 과소비의 폐해를 이제는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고 있는 동식물들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아름다운 단풍을 보는 일, 가을꽃의 향연에 취해보는 일,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서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을 낭송해보는 ,
가을에 하고 싶던 이런 일들을 올해는 잠시 내려놓으려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알맞은 때라 하지요.
이제라도 뜨거워져 가는 지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합니다.
내 작은 힘이 거대한 지구에 미치는 영향력이 티끌보다 작다 해도 괜찮습니다.
티끌도 모이면 태산이 되고, 낙숫물에 패는 돌도 있습니다.

묵묵히 제자리에서 할 일을 하는 민초들의 힘을 믿습니다.
한두 명의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민초들의 힘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왔습니다.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일이 이l가을에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는 봄을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가는 가을을 배웅하지 말고 내 손으로 붙잡자’
어린 시절 배운 동요를 이렇게 패러디해 봅니다.
올 듯 말 듯 가버리는 가을을 우리 힘으로 붙잡아 보고 싶습니다.
올가을, 꼭 시작하고야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