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린 날

by 우선열

첫눈이 내렸다. 나뭇가지 위에 지붕 위에 쌓이고 땅 위를 덮었다. 천지가 하얗다. 끝 간 데 없이 푸르던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온통 회색빛이다. 올해 첫눈은 마술사의 손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 같이 느닷없었다.

저녁 외출이 마뜩지 않건만 무료한 하루가보낸 아쉬워 모처럼 산책에 나섰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이건만 동녘 하늘에 하얗게 보름달이 떠 있었다. "어머나!" 작은 함성이 터졌다. 10월 보름이었다. "10월 상달에는 조상님들께 제를 올려야지, 붉은팥 시루떡을 하면 액을 막을 수 있단다" 해마다 이맘때 할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었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에 보름달의 감동이 채 멎기 전이었다.

"첫눈이다" 젊은이의 목소리가 들리며 콧등 위에 차가운 감각이 스치나 했더니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 소복소복 눈이 내리면 행복이 올 것 같아요" 인기 드라마의 대사가 떠오르는데 웬걸 소복소복이 아니었다. 퍼붓듯이 쏟아져 내렸다. 행인들의 어깨 위에 나뭇가지에 쌓이고 길위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삽시간의 일이었다. '올해 행복은 소복소복이 아니라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려나 보다' 근거 없는 기대에 젖어도 좋았다. 흰 눈이 한 해 동안 쌓인 근심 걱정 모두 덮고 좋은 일만 생길 듯 했다.

매스컴에서는 흰 눈의 감동과 함께 예상되는 걱정을 늘어놓고 있다. 교통체증이 시작되었고 미끄러운 길에서 일어날 사고를 조심하라는 경고 메시지이다. 비 온 뒤의 상쾌함과는 달리 눈은 뒤끝이 질기다. 미끄럽거나 질척이는 길을 견뎌야 한다. 조심하는 것까지야 감수한다지만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엔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물색없이 강아지처럼 좋아할 수만은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

아직은 눈길이 뽀송 보송하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경쾌하다. 미끄러운 길은 다음의 일이다. 지금은 흰 눈을 즐기려 한다. 다음이라는 말로 지나온 세월이었다. 미래를 위해 모든 걸 저당 잡히고 꽃이 피는지 눈이 오는지 모르고 살았다. 지나고 보니 다음이 바로 저당 잡힌 오늘이었다. 오늘을 맞이할 뿐 다음은 오지 않는다. '걱정은 다음에, 오늘을 충실히'가 답이라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눈 쌓인 길에 자동차 바퀴 자국은 시원하게 뻗어있고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다. 자동차로 빨리 가도 집, 걸어서 천천히 가도 집이다. 저녁 식탁에서 대화가 이어질 것이다. 눈길을 걸으며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본 이야기, 길 위에 찍힌 발자국과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들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시야를 가리는 눈발로 힘든 귀갓 길에 대한 불평일 수도 있다. 나는 자동차로 빨리 집에 가기만을 원했다. 다음이 우리를 기다려 줄 줄 알았다.

어느 날 문득 보름달이 뜨던 날 느닷없이 내린 눈처럼 오늘이 소중해졌다. 그건 세월의 힘이고 나이 듦의 여유이기도 하다. 아직은 미끄럽지 않은 뽀송뽀송한 눈길에 감사한다. 오늘 흰 눈을 밟는다.이제 다음은 없다. 흰 눈 덮인 아름다운 세상에 살 수 있어 행복하다. 잔뜩 찌푸린 눈 내리는 회색빛 하늘에 마음의 비둘기 한 마리 날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