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김치

by 우선열

갓 버무려 낸 상큼한 겉절이부터 곰삭은 묵은지까지 김치는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맛있다. 어린 시절 이맘때 김장철은 마치 잔칫집 같았다. 동네 아낙들이 서로 품앗이를 해가며 집집마다 김장을 담갔다. 그런 날은 아이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김장 마당을 들락거리며 어머니들이 입에 넣어주는 배추쌈을 받아먹곤 했다. 아직 김치가 되기 전, 절인 배추를 길게 죽 찢어 김치 속을 돌돌 만 배추쌈이었다. 숙성되지 못한 양념은 조금 맵고 알싸해 입안이 얼얼했지만 입가에 묻은 양념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입맛을 다셨다. 쉽게 물리는 달콤한 사탕 맛과는 달리 김치 맛은 중독성이 있었다. 들락날락 배추쌈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간이 맞으면 갓 삶아낸 뜨끈한 수육 한 점이 들어 있기도 하고 싱싱한 굴 한 점이 입안에서 툭 터지기도 했다. 집집마다 백 포기씩 김장으로 월동 준비를 하던 시절이다

그때 김치들은 냉장고가 아닌 땅속에 묻었다. 아낙네들이 김치를 담그는 동안 남자들은 양지바른 곳에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었다. 인디언의 천막처럼 기둥을 세우고 덮개를 씌워 찬바람을 막았다. 배추김치는 물론 동치미, 깍두기, 총각김치, 백김치, 집집마다 취향에 따라 갖가지 김치를 담가두었다. 땅속에 김칫독만 묻는 건 아니었다. 배추며 무를 보관하기도 했다. 힌 겨울에 된장 푼 구수한 배춧국은 김칫국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특별한 날에 끓이는 소고기 뭇국도 맛있었지만 무는 긴 겨울밤 야식으로도 그만이었다. 땅속에서 겨우내 숙성된 무는 과일 못지않게 달고 시원했다.

그럼에도 정작 내가 땅속에 묻은 김치를 맛있게 먹은 건 70년대 중반쯤 냉장고가 보급된 이후였다. 새내기 직장인으로 타향살이를 할 때였다. 낯설기만 하던 억센 사투리에 익숙해질 무렵 멀리 부산으로 시집온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내가 살던 울산에서 부산은 고향 청주에서의 거리에 비하면 지척이었다. 시집살이를 한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고 단숨에 길을 나섰다.

"우리 어머님은 일본에 오래 사셨어, 개화된 분이야, 며느리도 딸처럼 대해주셔, 선우 너 오면 아주 반가워해 주실 거야, 음식 솜씨도 뛰어 나시거든, 일본식 전골을 특히 잘 만드셔, 한번 먹어 모면 잊지 못할 맛이라고들 해" 선배의 자랑이 힘이 되었다.

선배의 시어머님은 며느리보다 곱게 차려입고 상냥하게 나를 맞아 주셨다. 시어머니라기보다는 친한 이웃 언니 같았지만 만만치는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듯했지만 어색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선배의 말처럼 한눈에도 솜씨가 돋보이는 떡 벌어진 한 상차림을 받았다. 상 중심에는 커다란 냄비에서 소고기가 듬뿍 든 일본식 맑은 전골이 끓고 있었다. 육지에서 자라 바다음식에 익숙지 못한 나를 위한 배려였다.

일본식 전골은 얼큰하고 진한 우리 국물 맛과는 달리 달큼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지만 막상 내 입맛을 사로잡은 건 땅속에서 갓 꺼낸 묵은지였다. 삼월 초쯤이니 웬만한 묵은지에서 군내가 날 때이지만 땅속에 묻어 아직 개봉하지 않은 김칫독에서 막 꺼낸 묵은지는 그대로 싱싱했다. 한 잎 베어 물면 아삭아삭 씹히는 맛도 일품이었고 무엇보다 시원하고 개운했다. 전골보다는 김치에만 손이 갔다. 결국 김치 한 접시를 깨끗이 비워내고야 말았다. 시어머님은 당신의 솜씨가 발휘된 쇠고기 전골을 많이 먹지 않는 나를 못내 서운해했지만 지금 까지도 그때 묵은지 맛은 잊지를 못한다. 땅속에서 갓 꺼내 싱싱한 식감이 살아있고 고춧가루와 소금 이외에는 첨가물이 없어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귀한 소고기보다 맛이 있었다.

"어머님이 잘해주시지만, 그래도 시집살이야, 우리끼리 있을 때는 김치 세로로 쭉 찢어 돌돌 말아먹잖아, 어머님 계실 때는 예쁘게 잘라 접시에 담아 놓아야 해, " 훗날 시집살이에 익숙해진 선배의 투정을 들으며 솜씨 좋은 시어머니의 전골과 맛있던 묵은지가 생각났다. 그렇게 조금씩 어긋나는 게 삶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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