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밤을 황진이 시조와 함께

by 우선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어 내어 /춘풍 이불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시는 날에 굽이굽이 펴리라 '긴 겨울밤을 이렇게 로맨틱하게 표현하는 건 감히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감성이 아닐까 합니다

'나귀는 수레가 무거워졌다고 칭얼대는 데/한 사람 영혼이 더 실린 탓일세'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보낸 화답 시를 이렇게 멋지게 써낼 수 있는 사람도 황진이뿐인가 합니다.

요즘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드라마에 사랑 이야기는 필수입니다. 하다못해 폭력 드라마나 첨예한 사회적 이슈가 소재인 드라마라도 로맨틱한 장면 한두 컷쯤은 들어 있어야 보는 재미와 극적 요소가 살아납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사랑 이야기와 로맨틱한 장면들 속에서 희희낙락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많다는 건 그만큼 귀하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인스턴트 음식처럼 한 끼를 때우는 식사가 될 수는 있어도 지나고 나면 곧 잊히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잊힌 여인이라던가요? 배신당한 여인보다 억울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잊힌 여인이라 합니다. 그럴 것 같기는 합니다. 밉거나 악랄한 기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잊히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요. 불쌍하다는 기억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드라마가 재미있기는 합니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빠져들어 좀체 헤어 나오기 힘든 마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본 드라마도 뒤돌아서면 그냥 잊히고 맙니다. 나이 들어 건망증이 심해진 것도 있겠지만 너무 흔하게 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요? TV 앞에 앉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채널만 돌리면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볼 수도 있습니다. 요즘엔 채널을 돌릴 필요도 없더라고요. 하루 종일 드라마만 방영하는 채널도 있습니다. 심심해서 들어갔다가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기도 하고 유명세를 치른 작품을 보려다가 하루 종일 드라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볼 때는 분명 드라마에 빠져 있었건만 보고 나면 무얼 보았는지 남는 게 없는 겁니다. 드라마 한 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20분 만에 끝나고 나면 아쉬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입니다. 전 국민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아 있느라 거리가 한산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흔한 것과 귀한 것의 차이겠지요. 영상도 발달하고 볼 것이 많아지니 드라마는 한번 보고 잊치는 신세가 되고 말지만 오백 년을 내려온 황진이 시조 한 두 편은 우리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세월의 힘을 당할 수 없기는 합니다. 우리 시대엔 황진이 시 한 구절로 밤을 지새웠건만 요즘 사람들은 '황진이가 누구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황진이 시조는 오백 년을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역사 속에 계속 살아남을 것입니다.

요즘 드라마는 보는 순간엔 재미있지만 홍수처럼 쏟아지는 드라마에 떠밀려 갑니다. 한두 편 널리 회자되는 경우도 있지만 생명력이 길지는 않습니다. 많다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닌가 봅니다. 몇 편 안 되는 황진이 시조는 오백 년 동안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으니까요

새롭긴 하지만 가볍고 흔한 드라마보다는 오래되어도 두고두고 심금을 울리는 귀한 황진이 시조로 긴 겨울밤을 달래 보렵니다. 꿈 길에서라도 잊을 수 없는 귀한 님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