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추위는 추위도 아니야, 우리 어렸을 적에는 정말 추웠어, 문고리에 손이 달라붙곤 했었어, 윗목 자리끼는 얼어 있었어" 추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친구들과 나누는 말이다. "그땐 난방시설도 허술했고 입성도 부실했지 그래서 더 추었을걸, 기온차도 있기는 하겠지만 " 이때쯤이면 친구들은 저마다 회상에 잠긴다. 추웠던 겨울로 되돌아간다.
이번 겨울에 나는 느닷없이 엄마와 둘이 하던 기차여행이 떠올랐다. 취학 전이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 외에 왜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다만 주덕 이모 댁에 가던 길이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철길을 따라 걷는데 바람이 몹시 차가웠고 어머니는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감아주었다. 거센바람에 목도리가 풀어져 날아가 버려 목도리를 줍기 위해 주춤주춤 바람을 따라 걷던 어머니 모습만 선명하다.
엄마 손을 잡고 걸었던 기억이 분명하니 6~7세 무렵이었나 보다. 그 시절 기차여행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막냇동생이 태어나기 전인 건 확실하다. 어머니는 왜 우리 4남매 중 나만 데리고 기차여행을 하셨을까? 언니나 남동생이었다면 정황상 자연스러운일이겠지만 가운데 낀 내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내가 꼭 가야 할 사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인데 이제 갑자기 생각난 건 또 왜일까? 어린 내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는 예감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둘째 딸 콤플렉스가 있다. 우리 부모님은 당시의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아들딸을 차별하는 분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는 약하니 힘든 일은 누나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교육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둘째 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건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생일이다. 음력 7월 복중 더위에 태어났다. 내 생일이 다가오면 어머님은 늘 말씀하셨다
"복중 더위잖니 그 먼 길을 할아버지께서 걸어오신거야. 모시적삼이 흠뻑 젖었더라 '둘째 딸이라 안 왔다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왔다' 하시는거야, 세 며느리가 그만그만하게 출산했는데 너한테만 오신 거지"
할아버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씀이셨지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흠뻑 젖은 모시적삼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둘째 딸로 태어난 것이 내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두 번째는 외할머니다. 외할머니는 첫 손녀인 언니를 유독 귀애하셨고 둘째 손녀는 나는 반갑지 않으셨다. 아들이기를 바라셨다. 외할머니께 우리를 맡기고 어머니가 외출을 하면 외할머니는 언니는 참기름 간장에 비빔밥을 주셨고 나는 물 만 밥을 먹이곤 했다며 어머니가 늘 안쓰러워하셨다.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났으니 외할머니는 두 귀한 손주들 틈에 낀 나를 마뜩지 않아 하셨던 듯하다. 안쓰러워하시는 어머님 말씀보다 내게는 외할머니의 구박이 먼저 닿았다. 그것도 역시 내 잘못은 아니다
이런 역할기대 때문인지 타고난 성정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착한 아이였다. 말썽 한번 안 부리고 저절로 컸다는 말씀을 종종 들었다. 내 어린 시절에 특별히 힘들었던 기억이 없으니 착한 성격이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비결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비교적 착하다는 평을 많이 듣고 그런 내가 싫지 않다.
싫지는 않지만 묘한 콤플렉스는 있다. '착하다' 는 게 ' 바보 같다'는 말의 동의어로 쓰이는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래도 괜찮아, 좀 손해 보면 어때, 너무 이악스러운 것보다는 낫잖아'이렇게 혼자 위로를 한다.
'아마 그 기차여행은 둘째 남동생이 태어났거나 태어날 무렵이었을 것이다. 고만고만 네 아이 육아가 버거워 나를 이모님 댁에 맡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머니와 둘만의 여행이 좋은 일이었기 보다는 힘든 일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이제는 확인해 줄 어머니도 안 계신데 왜 이제야 가슴 앓이를 하는걸까 ? 어머님 생전에는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기억이다.
이것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아닐까? 어머님 마음이 아프실까봐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었나보다. '착한 사람' 이어야 했던 내 정체성이다. 공연히 어린내가 불쌍해진다. 마음이 추운 겨울이 되려나 했건만 나는 어느새 "그래도 괜찮아, 착한 아이였으니 어머니도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 거야, 결국 떼어 놓지도 못하셨잖아 ' 하고 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때문에 앞으로도 내 겨울은 내내 춥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