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 때 먹는 떡국을 좋아한다.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해도 떡국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 우선 하얀 떡국은 새해를 맞는 마음과도 닮았다. 설날에 떡국을 먹으면 하얀 백지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 같다. 살짝 얹은 색색 고명이 한해 동안 있을 좋은 일 일것만 같다. 알록달록 펼쳐질 앞날을 축복해주는 듯하다. 구수한 사골 국물 떡국도 좋고 시원한 굴 떡국도 좋다. 매콤한 김치 한조각을 얹으면 슴슴한 국물 맛이 살아나고 쫄깃한 떡과 아삭한 김치 식감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떡국에는 만두가 들어 있어 먹는 재미를 더한다. 만두는 집집마다 고유의 만두 속이 들어 있어 자칫 단조로운 떡국 맛을 풍요롭게 한다. 만두 한 개를 터뜨리면 또 다른 국물 맛을 보게 되니 곱게 빚은 만두를 터뜨리면 새해 복주머니가 터지는 듯 행복해진다.
젊어 한 때 떡국 맛을 잊은 적이 있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 것만 같았다. 앞만 보고 달려도 갈증같은 허기를 감당해야 했다. 일년만에 맞는 황금 같은 설날 연휴를 차에 시달리고 시시한 덕담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자의반 타의 반 명절 날 당직은 내 차지였다. 조용한 교무실에 음악을 크게 틀어 놓기도 하고 읽고 싶었던 책들을 하루종일 읽을 수도 있었다. 어머님은 객지에서 고생한다며 안쓰러워하셨지만 그런 관심도 부담스러웠다. 혼자인 것이 정서적 독립을 이룬 것처럼 의기양양해지기도 하고 자유를 맛보는 듯한 짜릿함에 젖기도 했지만 식사시간 만큼은 난감해졌다. 명절음식을 못 먹어서 서운하다거나 고향생각이 나 눈물이 찔끔했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일이 아니었다. 교무실에 앉아 떡벌어진 설 상을 받는 일이었다.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경상도 설음식이 조금씩 골고루 들어 있는 제대로 된 설상이 내 앞에 배달 되었다. 떡국과 전같은 명절 고유의 음식은 물론 사모님의 솜씨가 빛을 발하는 한과도 있었다.
한과에는 촘촘히 아주 작은 귤 껍질이 박혀 있어 입안가득 오렌지 향기가 감도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향기가 입안에 감도는 듯 하건만 "있을 때 잘할 걸" 그랬다. 당시에는 고마운 마음보다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고맙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세지는 듯한 부채를 감당해야 했다. 홀로 서는 것이 독립이라고 생각했던 젊음의 치기였다.
하나 뿐인 아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독거노인이 된 지도 벌써 7년, 아들의 설날은 유난히 바쁘다. 해외에 있는 날도 있고 일상에 밀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행여 엄마가 부담스러울까 염려 스럽다. 쿨하게 선수를 친다. " 독립 했으니 떡국 끓일 수 있지? 식사나 거르지 마라"
아들이 떡국 한그릇 제대로 먹고 있을지 안쓰럽기는 하지만 쓸데 없는 오지랖이다. 아들은 지금 떡국보다 한과에 취했던 내 젊은 날과 같을 것이다. 고맙고 부담스럼고 미안한 마음의 빚을 짊어지고 혼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있을 때 잘 해" 그 말의 의미를 깨우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야 한다. 뽀오얀 사골국물이 우러나야 떡국이 진국이 되듯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때쯤이면 떡국이 맛있어 진다. 새해를 새로 시작하는 의미가 더 새로워진다. 치열함에서 벗어난 하루하루가 더 소중한 날들이 된다 . 만두가 복주머니로 보이는 그런 날들이 오고야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