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봄은 여인들의 옷차림에서 온다. 슬프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다. 아파트 숲에 살다 보면 여인들의 옷차림이 먼저 화사해진다. 그때가 봄 꽃놀이를 가야 할 때이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선정릉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곳에는 봄이 오기 전에 봄을 알리는 전령사 복수초가 핀다. 선정릉에 가면 남보다 조금 빠른 봄맞이를 할 수 있다. 공짜는 없다. 때를 놓치지 않는 부지런과 섬세함을 갖춰야 한다.
이 번 봄 그 주인공은 나였다. 때마침 올라온 산수유 봉우리 소식이 힌트가 되었다. 일상 작파한 용기도 한몫했다. 덕분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복수초 봉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성미 급한 복수초도 있는 법, 조금 떨어진 양지바른 곳에서는 노란 복수 꽃이 별처럼 반짝였다. 환한 꽃무리가 마치 은하수 같다. 선정릉에 오고 있는 봄을 찾았으니 봄맞이는 이제부터 내 몫이다.
선정릉 봄맞이에 나섰다. 아직은 나목이 대세이다. 푸른 하늘에 빈 가지가 윤슬처럼 반짝인다. 예사롭지 않다. 혹독한 겨울을 인내한 나무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아직은 빈 가지지만 물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생기가 번지고 있다. 봄맞이를 나선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경지이다. 봄은 빈 나무 가지에서 시작된다.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 가지들 그들을 버티게 해주는 건 굵은 나무 기둥이다. 나무를 그릴 때 진한 밤색으로 표현하던 나무 기둥은 사실은 아주 많은 색을 가지고 있다. 하얗거니 붉거나 까맣기도 하고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우리들이 표현하는 나무 기둥 색일 수 있다. 적송 백송 흑송 말은 하지만 소나무 잎은 푸르고 줄기는 고동색이었다. 오래 보아야 꽃이 예쁜 것처럼 나무도 자세히 보아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준다
이 봄 내가 주목한 나무줄기는 수피였다. 오래전 삶이 강퍅하기만 했을 때 수피를 벗고 있는 플라타너스를 본 적이 있다. 스스로 껍질을 벗고 환골탈태하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두꺼운 껍질에 싸인 내가 보였다. 벗지 않고는 알맹이를 들어낼 수 없는 법이다. 나무들조차 스스로 터득한 진리를 나만 모르고 있었다. 그 우매함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수피는 플라타너스만 벗는 줄 알았는데 봄이 오는 길목에 선 나무들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껍질을 벗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일어나는 변화도 있고 두껍게 덕지진 껍질을 힘겹게 벗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가로로 혹은 세로로, 한 장씩이거나 무더기로 벗겨지기도 했다. 나무마다 저마다의 방식이 따로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지만 나무들 스스로 터득한 지혜이다
수피는 봄철에만 벗겨지지는 않는다. 나무는 스스로 자신이 변해야 하는 시점을 아는 듯하다. 수피의 색깔들은 나무마다 다르고 변화의 시기도 다르다. 적절히 때를 맞춰가며 그들은 봄을 기다린다. 나뭇가지에 싹을 틔우는 건 봄이다. 수피들이 견디고 적응해야 가지에 물이 오르고 싹이 튼다. 봄이 올 수 있다. 선정릉에서 비로소 수피를 본다. 그제야 가지 끝에서 막 움트려는 싹이 보인다. 봄이 오고 있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선정릉 산책로에서 길을 택하는 건 내 몫이다. 수피들이 껍질을 벗는 시기를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길을 택하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있다. 스스로 껍질을 벗는 아픔이 있어야 나무도 자란다. 후회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할 것', 수피가 말해주는 듯하다.
선정릉에는 부모의 손을 잡고 나들이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고 젊은 연인들의 행복한 데이트 모습도 있다. 벤치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는 어르신도 있다. 고비고비마다 수피 벗듯 해내야 할 일들이 있다. 나는 지금 적당한 시기에 내 껍질을 벗어 내고 있는 걸까? 도심의 회색빛에 가려 봄맞이 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선정릉 복수초가 알려준 봄을 수피를 벗는 나무들에서 확인한다. 내 안에도 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