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이 계속되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칩거하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겨울 한철을 그야말로 겨울잠을 자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다시 사람이 되려면 100 날을 마늘만 먹으며 동굴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잠시 추위를 견디는 게 나을 듯했다. 마침, 처지가 비슷한 친구가 비명을 질렀다 "어디든 가자!"
하필 가장 추운 날이었지만 그날의 기세는 추위도 꺾을 수 없었다.'우리에겐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하던 이순신 장군처럼 비장해졌다.
목표를 정하는 것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피천득 산책로였다. 우리 모두 피 선생님과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가능하면 이 산책로 근처로 이사 오고 싶을 만큼 의욕적이었다. 산책로 근처에 사는 후배가 진두지휘를 맡았다.
"이 길은 반포 시민공원까지 이어져요, 중간에 허밍웨이 길도 지나요. 그 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걸요"
앞장선 후배가 의기양양했다. 슬그머니 겁이 났다. 이 산책로에서 동작 한강 공원까지도 제법 멀다. 한강을 좋아하더라도 이 추운 날 강바람을 맞으며 동작 한강 공원까지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반포 한강공원까지 가려면 거리나 날씨나 무리가 따를 게 뻔한데 이 길이 초행인 친구는 신이 났다. "좀 춥지만 걷기 시작하면 열이 날 거야, 이 정도 추위쯤 문제없어" 큰소리친다. 동작 한강 공원에 가면 해치 버스도 있을 것이니 미리 의욕을 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도 적당히 분위기를 맞췄다 "그래, 오늘은 후배만 믿을 게, 잘 부탁해"
추웠지만 가까운 산책로에서는 별문제가 없었다. 피 선생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중간중간 선생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추위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허밍웨이 길까지도 괜찮았다. 주변에 나무들이 있어 찬바람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한강 공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벌판에 부는 바람을 맨몸으로 맞아야 했다. 뺨이 얼어붙고 손발이 시렸다. 두터운 방한화를 신었건만 별무소용이었다. 옆 개천 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갑자기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된듯했다. 뼛속까지 추위가 스미는 듯했다. 호된 추위 때문인지 해치버스도 간 곳이 없다.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었다. 한강 풍광을 즐기려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얼른 추위를 피해 노을 한강 카페로 들어갔다. 동작 한강공원에서 한강의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다고 이름난 카페이다. 몇 번 이 공원에 온 적이 있지만 공원의 풍광을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해 들어와 보지 못한 곳이다.
안은 따뜻했다. 따뜻한 생강차를 손에 쥐니 얼었던 손이 스르르 녹는다.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비로소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창을 통해 보는 한강은 분명 같은 장소이건만 높이가 다르니 보이는 것이 달랐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한강에서는 자연을 즐기는 것만이 목적이라던 지난날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고정관념이 멀리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자연환경도 좋고 즐겁지만 문명의 이기도 누려야 한다. 편향적 사고로는 멀리 볼 수 없다. 몹시 추운 날 한강변 산책길에서 얻은 지혜이다. 이만하면 추위 견딜만하다. 추운 날 겨울 산책 이만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