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봉은사 홍매화에서

by 우선열

"멀리 갈 것 없어, 발길 닿는 곳마다 풍광이 새로워, 대한민국 살기 좋아졌다니까, 시간 돈 버리고 외국 나갈 것 없어, 비행기에 시달리느라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그 고생을 왜 해, 지자체마다 관광객 유치하느라 정성을 기울이거든"

"맞아, 이젠 고향엘 가도 길 찾기 힘들더라, 풍광도 아름답고 편의 시설도 잘 돼 있어, 환골탈태한 모습이야, 좋긴 하지만 섭섭할 때도 있더라, 옛날 고향 모습이 그리운 거지, 그래도 곳곳에 옛날 모습을 재현해 놓은 프로그램도 있으니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어,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야"

이때쯤 되면 새마을 운동부터 월남 파병, 독일 간호사, 허리띠를 졸라매던 전후 시절의 무용담이 한참 이어진다.

"얘, 이런 얘기 우리끼리나 해야지 젊은이들한테 했다가는 꼰대 소리 듣는다, 유관순이 누구냐고 묻는 학생들도 있대"

누군가 말머리를 돌리면 이번엔 시국 얘기로 시끄러워진다. 패턴처럼 늘 이어지는 이런 말들이 싫지 않다. 가끔 앞으로의 세상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결론은 "잘해나갈 거야, 젊은이들을 믿어"로 끝나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다.

서울시내만 하더라도 곳곳에 아름다운 공원이 있고 박물관이며 전시회, 팝업스토어들이 있어 심심치 않다. 큰돈과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나도 갈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즐겨 찾는 장소들이 있다. 선정릉 복수초가 겨울의 끝을 알리고 봉은사 홍매화는 봄을 알린다. 이때쯤이면 탄천엔 풀꽃들이 사랑스럽다.

어제는 봉은사 홍매화를 찾아 나섰다.' 홍매화를 못 보고 이대로 봄이 가버리면 어쩌나 ' 걱정하고 있었다. 은퇴 후 정작 이렇다 하게 하는 일은 없지만 일상은 그냥 바쁘다. 마치 봉은사가 천리 나 되는 것 같았는데 마침 어제는 자투리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도심 공원의 특장점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아도 어쩌다 생긴 틈새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봉은사에 가면 늘 종교인들이 부럽다.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절대자가 있다는 건 마음 든든한 일일 듯하다. 신앙을 가꾸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게 아니라 모태신앙을 가지지 못한 게 서운해진다. 한편으론 세상 모든 신들이 나를 보살펴 주는 것이라 위로한다. 새벽 정화수를 떠놓던 어머니의 심정이라면 어떤 신의 가호 못지않다고 큰소리도 쳐 본다.

봉은사 홍매화는 이런 치기 어린 마음도 보듬어 준다. 매화의 고결한 성품에 화려한 진홍빛 옷을 입었으니 매혹적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봉은사의 봄은 홍매화를 즐기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같다. 이런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 불심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향한 자비가 홍매화 송이마다 피어난다. 나는 누구에겐가 한 번이라도 홍매화처럼 아름다워 본 적이 있는가? 자문해 본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불심 아니겠는가. 가까운 곳에서 도심의 봄을 즐길 수 있으니 이 또한 시대의 행운이자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