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이 사과를 먼저 먹는다.

by 우선열

물건을 구입하는 성향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격보다 품질을 우선하는 경우와 품질도 중요하지만 가격을 무시하지 못하는 성향도 있다. 전후 가난한 시대를 살아서인지 나는 다분히 가격에 민감한 편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도 가격 앞에서 마음이 변한다. 같은 용도인데 비싼 가격을 치르는 일이 못마땅해지고 적당한 가격의 물건이 좋아 보인다.

'이거 하나 사느니 같은 가격으로 두 개 사면 번갈아 쓸 수도 있고 더 오래 쓸 수 있을 거야"의기양양해진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쓰지 않는 물건이나 입지 않는 옷이 차고 넘친다. 분명 살 때는

"싼 옷이니 분위기에 맞게 한두 번 입고 버리지 뭐, 옷 입는 건 센스야, 비싼 옷보다는 때와 장소에 따라 분위기에 맞게 입어야 해" 했건만 한번 내 손에 들어온 옷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언제 또 필요할지 모르잖아, 작업복으로라도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한다

우리 집은 늘 쓸모없는 물건으로 복잡하다.

요즘엔 공간 비용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버리면 생활이 편리해질 걸 알고 있건만 공간을 낭비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이건 정말 쓸모없는 낭비라고 알고 있건만 70 평생 몸에 밴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김장을 백 포기 이상하고 연탄을 창고 가득 들여놓아야 월동 준지가 끝나던 시절을 살았다. 뭐든 쟁여 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같은 또래의 친구들 중에서 품질을 우선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걸 보면 꼭 시대를 탓할 일만도 아니다. 개인적 성향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사과 한 박스를 놓고 크고 좋은 사과를 먼저 먹는 사람과 못난이 사과를 먼저 먹는 사람의 차이 같은 것이다

한 박스를 먹는 내내 가장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무시하고 상한 사과를 먼저 먹는다. 우선 버려지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결국 크고 좋은 사과도 아끼다가 시들해져서야 먹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하고 가장 친한 친구는 나하고 반대 성향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고 가격에 상관없이 좋은 물건을 고른다. 아끼던 물건이라도 필요 없어지면 미련 없이 버린다. 꽃샘추위가 심한 날 그녀는 여지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타나 벌벌 떨고 있다. 겨울옷을 미리 정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당장 입을 옷을 얼른 구입하겠지만 그녀는 마음에 드는 좋은 옷이 아니면 사지 않는다. 하루 이틀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 단순히 집안 정리가 잘 되어서만은 아니다. 그녀는 모든 소비생활이 비싸도 좋은 것이었다.

집도 예산에 맞춰 적당한 집을 사기보다는 무리를 해서라도 크고 좋은 것을 샀다. 압구정, 도곡동, 그녀가 고른 집들은 서울에서도 가장 노른자위 집들이었다. 내 형편에 맞게 작은 평수를 고른 나와는 달리 그녀는 돈의 액수보다는 그녀 마음에 드는 넓은 평수를 선택했다.

"내가 안목이 있는 거지 뭐" 그녀가 말하지만 그건 안목 만은 아니다. 안목을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과 뱃장이 있어야 한다

"저지르면 어떻게든 되던데, 내 힘만은 아닌 것도 같아, 하늘이 도와준 거지"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내 말에 대한 그녀의 답이다. 하긴 안목과 뱃장도 타고 태어나야 한다 소심한 졸보로 태어난 내게는 부족한 돈을 무시하고 저지를 뱃장은 없다. 빚을 지고 맘고생을 하느니 마음 편한 게 낫다.

친구는 이자 갚느라 고생했지만 집값이 많이 올라 이자 제외하고도 또 한 채 집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작은 집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나와는 천양지차이다. 차이가 너무 커서인지 부럽지도 않다 .남의 손에 떡일 뿐이다.

친구는 요즘 부쩍 나를 부러워한다. 글 쓰는 일에 재미가 들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한다. 그는 이젠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한다

"글을 써 봐" 하면 "나는 재주가 없어서 쓸 줄도 몰라 "한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지, 열심히 공부해야지, 많이 읽고 쓰고 돈 버는 것처럼 노력하면 돼"

"그거 해서 뭐 하게? 나는 특별히 돈 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어, 그냥 주어진 일 열심히 하다 보니 저절로 된 것 같아 하늘이 도와준 거지 "

"좋다, 하늘이 도와주면 조금만 노력해도 잘 쓸 수 있을 거야"

"아니야, 나는 글 쓰는 재주는 없이 태어난 것 같아,"

"재주가 아니라니까, 나도 못써, 그냥 열심히 쓰는 거지, 그러다 보니 재미있어지고"

"너는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어, 뭐든 그거 해서 뭐 하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거든"

"뭐 하긴, 남은 생애 즐겁게 사는 거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동안 하고 싶은 것 해봐야지"

"하고 싶은 게 없다니까.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건강하지 못하게 오래 살아서 가족들 힘들게 하게 될까 봐 걱정돼,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거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행복했으면 해"

"너는 좋겠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거 해서 뭐 하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그녀와 만날 때마다 나누는 이야기이다. 나는 많이 가진 그녀가 부럽지 않은데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있는 나를 부러워한다. 크고 좋은 것을 탐하는 것과 작고 보잘것없어도 내 것이 소중한 성향 차이가 아닐까? 크고 좋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자잘한 것을 즐기는 법을 잊었을 수도 있겠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내 성향을 사랑하기로 했다. 크고 좋은 것은 남의 눈에도 좋아 보인다. 내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좁아터진 집구석에 여기저기 쌓여 있는 물건들은 정이 들어 있다. 쓸모없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 넓고 쾌적한 집보다는 공간 비용이 많이 드는 우리 집을 사랑하련다. 하고 싶은 일이 없는 노년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사는 게 즐거운 노후가 낫지 않겠는가? 그게 비록 값싼 물건을 사들이는 일이라 해도 나답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