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제집 드나들 듯한 적이 있었다. 70년대 말 80년 대 초이니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고 자갈치 시장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누볐으며 동래 온천에서 고소한 파전을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거주지는 울산이었지만 주말이면 곧잘 부산에 갔다. 주로 부산으로 이주해 온 친구들 때문이었다. 당시엔 청주에서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전화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소문은 빨랐다. '부산에는 누가 산다더라' 울산에 발령받은 후 제일 먼저 받은 것도 재부 동문회 명단이었다.
그중 내가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은 부산으로 갓 시집온 친구들이었다. 객지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더 각별해지는 법이다. 다만 그 시절만 해도 갓 시집온 새색시들의 행동반경은 넓지 않았다. 주로 집 근처로 가거나 집을 방문해야 했다. 갓난아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은 시어머니조차도 집 방문하는 걸 꺼려 한다지만 그 시절엔 웬만하면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상례였다. 은이, 숙이, 순이, 친한 여고 동창이 세명이나 되었고 아주 친한 대학 선배도 있었다. 각자 사는 곳이 달랐으니 부산의 유명 관광지보다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부산의 골목길에 더 익숙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모처럼 부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통과의례처럼 들려야 했던 해운대 바닷가도 있다. 거의 관광을 위한 관광이었으니 충청도 산골 처녀로 바다가 로망이었건만 바다의 풍광보다 사람이 반가웠던 기억만 남아있다. 그토록 반가웠던 친구들인데 지금은 연락 두절이니 세월 참 무심타. 모두들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이런 모든 순간들의 기억을 제치고 지금 내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광경은 아주 어색했던 한순간이다. 그 시절엔 남학교에 여교사가 별로 없었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도 유일한 여교사였으니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의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홍일점의 특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지만 그 시절이 길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경력 있는 여교사가 발령을 받아 왔다. 여자 동료가 생기는 좋은 일이었지만 관계가 좀 묘해졌다. 분명 우리 학교에 내가 먼저 발령을 받았건만 나는 새내기 교사였고 그녀는 경력직인데다가 우리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미 다른 선생님들과 친분이 있는 상태였다. 홍일점의 묘미를 알고 있었으니 내가 눈에 가시 같았었을 수도 있었겠다. 여자 동료가 필요했던 내게는 벅찬 상대였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들었다.
마침 여교사 연수가 부산에서 있었다. 부산에 하루를 머물러야 하는 일정이었다. 둘이 가는 것까지야 할 수 있었지만 숙소가 문제였다. 남자 선생님들이 "여자 혼자 어찌 숙박업소를 찾노, 그냥 이 선생 집으로 가라. 이 선생 괜찮지?"이구동성으로 말했고 교장선생님이 쐐기를 박았다. "어쩌겠노, 이 선생이 잘 돌봐 줘라, 객지에 후배 아인가?" 하셨다. 그 말씀에 자리를 잡지 못하던 관계가 정립되었다. 나이순이었다. 관계에 이악스럽지 못한 내게 특별한 이견이 있을 리 없고 후 배 노릇이 편하기도 했다. 그녀도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었나 보다.
연수가 끝난 후 부산 시내 구경에 나섰다. 유명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던 기억이다. 기념품을 사기도 했던 것 같다. 다른 기억은 어사무사 별로 또렷하지 않은데 백화점에서 나와 주변을 돌아 볼 때 생경하던 풍광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장 화려한 백화점 뒷골목은 아주 좁은 미로였고 구불구불 언덕으로 이어져 가파르게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은 그림 같지만은 않았다. 삶의 냄새가 짙게 배여 있었다. 바다를 동경한 육지 소녀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