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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성 Aug 20. 2018

차라리 고양이였다면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을 읽고

아침부터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했다. 어려운 건 대화였다. 차라리 외국어가 좋았다. 일상적인 대화라는 것, 목적 없이 주고받는 말에 적응하는 일은 매해 쉽지 않았다. 저런 말은 왜 하는 건지,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를 가늠하는데 적지 않은 마음을 투자해야 했다. 아주 어렸을 때, 집을 벗어났을 때. 첫 번째 사회는 학교였다. 그래서 입 대신 귀를 열어뒀다. 듣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흘리듯 하는 말들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그게 내 말이 되었다. 그걸 최대한 정교하게 다듬고 싶었다. 가능하면 늘 침묵하고 싶었다.


학교는 거대한 프로토타입 같았다. 수업 시간엔 어떤 말이든 던질 수 있으니까,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리면서도 가끔은 반 전체를 웃길 수 있었다. 웃음은 아주 효과적인 상품, 썩 괜찮은 생존의 기술이었다. 몇 번을 시도하면 한 번은 성공했다. 가끔은 손바닥을 맞기도 했지만 웃음은 무해했다. 사귀고 싶은 친구와는 언젠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될 것 같았다. 쉬울 리 없고, 가끔은 심하게 권태로웠지만 절대 벗어날 순 없었다. 그런 게 인간사회 같았다. 한때, 요조의 무기도 익살이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과연 학교의 테마는 생존이었다. 단계별로 다양한 사례를 수집하면서 상처와 치유를 반복하는 공간이었다. 요조는 태어나면서부터 필사적이었다. 요조에게 익살은 기술이 아니었다. 극도의 두려움, 불안과 공포의 결과였다. 벗어나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지니고 살아야 하는 짐이기도 했다. 언뜻 인기인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학교에선 그게 성공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개인은 점점 피폐해졌다. 어쩌면 도피, 끝없는 역설의 시작이었다. 요조는 이렇게 썼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목숨을 걸고 하는 등교는 아니었지만, 생존은 가차 없이 피곤한 일이었다. 어쩌면 혼자 있는 법을 동시에 연습했는지도 몰랐다. 같이 있고 나면 반드시 혼자 있어야 했다. 상대에게 에너지를 쏟아내고 나면 반드시 혼자 채워야 했다. 몇 년의 소모와 시행착오 끝에 찾은 균형이자 기술이었다. 가까스로 익숙해졌을 땐 그런 리듬을 조율하기도 했다. 혼자의 효율을 높이면서 같이 있는 시간의 에너지를 배분하는 식으로, 나는 가까스로 적응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어쩌면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몰라.’


누구에게나 각자의 가속 페달이 있는 거니까, 그게 나의 속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른의 나이’가 된 건 몇 번을 돌이켜도 행운 같았다. 살아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곱씹으며 잠들었다. 일어날 때마다 쌓여가는 아침의 무게가 점점 버거웠다 해도…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중략)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요조에게도 이렇게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곧 배신당했다. 배신의 주체는 친구였는지 요조 자신이었는지. 어쩌면 시간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어른이 될 수는 없었던 사람, 상처라는 말로는 모자란 상처, 배신이라는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배신, 누구의 잘못과 책임을 찾을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이후는 악화일로, 암담한 구렁이었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고 시간은 막을 수 없었다. 불행이 행운처럼 왔다. 하지만 행운은 쾌락처럼 사라지잖아? 불행은 아주 깊은 흉터를 남겨두고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내내 아프던 끝자락에 요조는 이렇게 썼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차라리 혼자 사는 고양이였다면 어땠을까? 혹은 정글에서 살아가는 아주 작은 동물, 겁이 많고 약하지만 경계심 하나는 끝내주는 동물이었다면? 차라리 나무였다면? 어쨌든 영원히 외톨이라도 괜찮은 자연의 일부였다면. 요조가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차라리 무(無)였다면. 그저 인간이 아니었다면?


가정은 부질없고, 오늘은 어제보다 늙은 채 아침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은 어제보다 멀어졌는데 오늘도 애꿎게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침묵하면 관계할 수 없고 말하자니 고단해졌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내 삶이 끼어 있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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