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우성 Aug 20. 2018

지루하게, 더 위태롭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그때, 공연을 보고 나왔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대학교 도서관 컴퓨터에 몇 시간이고 매달려 겨우 구한 두 자리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을 땐 거의 자정이었다. 우리는 거슬러 걷기로 했다. 그럼 한산한 거리가 나오겠지, 택시도 잡힐 거야.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도로는 금세 얼었다. 자꾸 미끄러지다 결국 넘어질 것 같아서 손을 잡았다. 작고 얇고 빨갛고 차가웠던 손가락이 내 손 안에서 천천히 녹을 때 자정이 지나 크리스마스였다. 선물 같았던 시간.


이제 우리는 번화가에서도 멀어져 있었다. 사람도 택시도 없었던 주택가였다. 작은 선술집,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슈퍼마켓 옆 길가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겨우 녹은 손이 이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머리카락 위에도 눈이 쌓이고 있었다. 녹다가 얼고 있었다. 쓰다듬으면 얼음 같았다.


“일단 들어가자.”


마침 불이 켜져 있던 공중전화 박스에서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줬더니 긴장이 풀리면서 몸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한텐 ‘안았다’와 ‘안겼다’가 같은 단어 같았다. 조난당한 사람들처럼 서로를 결박하듯 안고 안겼다. 작고 얇고 차갑고 예쁜 몸이 내 외투 안에서 천천히 녹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있었지? 추워서 문을 닫아 놓은 공중전화박스에 김이 서릴 즈음, 그래서 서로의 더 이상 몸이 떨리지 않을 즈음, 그 좁은 공간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사이가 되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예매했던 콘서트 티켓 두 장, 그 맑았던 날 밤에 갑자기 쏟아지던 눈, 많고 많았던 사람들을 피하려고 걷다가 마주쳤던 조용한 동네, 딱 하나 있던 공중전화 박스... 그러다 우리 앞에 거짓말처럼 섰던 그 택시까지. 돌아보면 다 우연 같았다. 피부와 키스의 온도차가 생생했다. 우리도 몰랐던 의지. 우리는 관계의 시작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만났던 순간을 여섯 가지 우연의 총합이라고 생각했다.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이어 썼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전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가볍고 또 가볍게. 어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듣고 있던 음악이 마침 2악장에 접어들었을 때 횡단보도 건너에 있는 누군가 시야에 들어온다거나, 자주 가던 식당이 만석이라 어쩔 수 없이 찾은 그 식당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갖는 식으로. 하지만 완벽한 협주곡처럼 시작한 관계도 끝은 적막이었다. 우리가 같이 즐겼던, 신기해 마지않던 우연들은 소리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추웠던 크리스마스 새벽, 우리는 겨우 도착한 집 앞에서 어떤 술집에 들어갔었다. 작고 싸고 따뜻한 바였다. 우리는 안경에 성에가 껴서 냅킨으로 몇 번이고 닦다가 서로를 보곤 ‘바보 안경’이라며 또 크게 웃었다.


“이제 우리…”
“응?”
“나 누가 남자 친구 있냐고 물어보면 ‘있다’고 대답해도 되는 거야?”
“응. 나도.”


우린 어렸고, 우연과 낭만에 휩쓸렸고, 마음이 허락할 때까지 충실했다. 시작할 땐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관계는 그러다 끝났다. 시간은 흐르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몇 번의 사랑을 수순처럼 거쳤다. 그러니까 다, 시작하고 끝나는 일들.


모든 마무리에는 몇 가지 징후가 있었다. 떨어져 있을 때 매달리듯 보내던 편지가 끝내 도착하지 않거나, 그게 초조해서 주고받았던 몇 통의 전화는 달갑지 않았다. 습관처럼 하던 약속은 습관이라서 지겨워진 것 같았다. 자꾸만 멀리 가고 싶어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애초에 우리가 우리가 아니었던 곳으로. 그러다 다시 일상을 나눌 수 있게 됐을 땐 이미 달라진 체온이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데서 사는 동물이 되어 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이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중략)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헤어질 땐 지구가 잠길 것처럼 울었어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로의 상처를 최소화해주려고 애쓰는 건 약속이 아니었다. 같이 했던 시간만큼의 매너였다. ‘가슴이 아프다’라는 말이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언어의 무게를 몸으로 실감했더니 입이 무거워졌다. 우연과 사랑은 잊히거나 끝났지만 언어는 책임으로서 영원했다. 이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정말 가슴이 아플 때만 쓸 수 있게 됐다.


사랑은 가까스로 아름다웠다. 대체로 힘에 겨웠다. 이별도 아름다움이라면, 그로부터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주제도 있었던 걸까? 영원히 이럴 거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았다고 느껴지는 날도 적지 않았다. 누군가는 말했다. 그저 혼자가 되기 싫어서 같이 있는 거라고. 상대는 누구여도 상관없다고. 갑자기 혼자가 되는 건 두려우니까. 그래도 같이 있을 땐 잊을 수 있는 게 많이 있다고. 그것도 사랑일까? 사랑이 꼭 아름다워야 할까? 테레자는 인생의 말미에 후회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정말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 (중략) 그녀는 목욕물을 받았다. 그녀는 뜨거운 물속에 누워 자신이 일생 동안 자신의 허약함을 빌미로 토마시를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했다.”


묻고 싶었다. 이렇게 현란한 이야기, 다 따라잡을 수도 없는 사랑의 역사, 그 모든 환상과 은유로부터 멀어지면 마침내 사랑의 맨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 얼굴은 혹시 권태가 아닐까? 후회와 희생? 어쩌면 실낱 같은 의지? 우리 사이에 남아있는 모든 아침의 얼굴, 지루하고 또 지루해서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 일상의 무게 같은 것.


사랑은 그 안에, 무슨 물방울처럼 투명하게 맺혀서 작고 위태로웠다. 그때 내리던 함박눈은 이제 보니 깃털 같았다. 어쩌면 모든 비밀이 그날 밤에 있는 것 같았다. 위태롭게, 지루하고 맹숭맹숭하게, 우리는 한없이 가벼워졌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

매거진의 이전글 차라리 고양이였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