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빅 브라더’와 ‘디스토피아’는 동의어 같았다. 권력과 통제의 대명사,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세상에 대한 짙은 상징이었다. CCTV와 블랙박스, 서로의 휴대전화 영상 속에 서로가 노출된 채 지금처럼 살면서 “1984”에 대해 말하는 일이야말로 쉬워 보였다. 우리는 2018년을 살고 있는데도. 하지만 뭐 얼마나 다를까? 인간은 변하지 않아서 인간인지도 모른다. 사회는 오래 정체돼 있다가 가까스로, 서서히, 누군가의 희망 속에서만 전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의 근본은 통제였다. 통제의 바탕은 시선이었다.
‘텔레스크린’은 언제나 모두를 감시할 수 있는 장비였다. 사람들은 감시당하는 줄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익숙해져 있었다. 완전히 종속된 채 그 안에서만 자유롭다 믿는 역설. 기술이 다가 아니었다. 딸에게 고발당해 끌려가는 아버지는 당에 대한 딸의 충성심을 자랑스러워했다. 세계의 어느 한쪽은 늘 전쟁이었다. 승리와 패배가 영원히 이어졌다. 적대감과 긴장, 증오와 혐오를 근본 삼아 유지되는 평화였다. 자유는 자유가 아니었고 평화도 평화가 아니었다. 거대한 역설의 지배였다. 그 안에서, 윈스턴은 감히 상상하는 사람이었다. 종속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작은 일기였다.
“윈스턴은 노트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그는 무기력하게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자신이 무의식 중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전처럼 서툰 글씨가 아니었다. 그는 펜을 쥐고 매끄러운 종이 위에 큼직한 대문자로 보기 좋게 다음과 같이 똑같은 글을 되풀이하여 써서 반 페이지를 채웠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 생각이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건 종이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윈스턴은 개인이 노트를 소유하는 일, 거기에 뭔가 쓰는 일은 모조리 금지된 사회에서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라는 문장을 무의식으로 썼다. ‘사상죄’였다. 영원히 감출 수 없고 언젠간 들통나 뒤에서 총살당할 범죄였다. 체제가 좌뇌를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없는 세상에선 사랑도 통제돼 있었다. 섹스는 번식만을 위한 것이었다. 체제가 마음과 욕망, 우뇌를 통제하는 법이었다. 당의 통제는 이런 식으로 인간의 머리를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일상이 곧 세뇌이자 훈련이었다. ‘자유는 예속,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이라고 믿게 만드는 권력이었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썼다.
“어릴 때부터의 철저한 훈련으로, 운동과 냉수욕으로, 학교와 스파이 단과 청년동맹에서 주입시키는 온갖 쓰레기 같은 말들을 비롯하여 강의, 행진, 노래, 슬로건, 군가 등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괴멸되어 갔다. (중략) 만족을 위한 성행위는 반역이었다. 성욕은 사상죄에 해당되었다. 그가 캐서린을 깨워서 만족스러운 성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아내를 유혹한 죄를 짓는 셈이 되었다.”
하지만 상상하고 욕망하는 마음을 막을 도리는 없으니까, 윈스턴은 줄리아를 만났다. 그녀가 건넨 쪽지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잔디가 깔린 언덕, 키 큰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서 몰래 사랑을 나눴다. 조금 더 과감해졌을 땐 마을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상경찰도 텔레스크린도 없다고 믿었던 그 방에서 오로지 둘 뿐이라고 믿었다. 윈스턴은 달콤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여름밤의 침대에서, 둘이서만, 오로지 마음에 따라, 누구의 감시에 대한 염려도 없이 보내는 농밀한 시간 같은 게 과거에는 가능했을까? 그게 역사였을까? 그들은 달콤한 범법자였다. 하지만 경계심을 잃고 과감해진 범죄자는 곧 잡히는 법이라서, 줄리아와 윈스턴은 같이 끌려가 곧 분리됐다. 사랑은 이제 와서 환상 같았다. 체포가 현실이었다. 고문은 참혹했다.
윈스턴의 몸은 점점 해체되고 있었다. 마음은 쪼개지고 있었다. 거울도 없는 방에서 허벅지가 나뭇가지처럼 가늘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척추가 툭 튀어나왔다. 구타와 고통 때문에 몸이 점점 왜곡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고통은 피할 길이 없었다. 고통 앞에선 신분이나 계급, 영웅도 없었다. 윈스턴은 굴복했지만 당이 원하는 건 순종만이 아니었다. 텅 빈 인간이었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는 걸 진심으로 믿을 때까지 다양한 고문이 계속됐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이젠 당이 가르치는 대로 기계처럼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고문자 오브라이언이 물었다.
“자네한테는 이제 자존심 같은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걸세. 자네는 발길로 채이고 매를 맞고 모욕을 당하는 동안,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지르며 피와 침으로 뒤범벅이 된 채 바닥을 뒹굴었네. 그리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면서 모든 사람을 배반하고, 모든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지. 자네가 자존심을 지켰다고 말할 만한 게 한 가지라도 있다고 생각하나?”
“저는 줄리아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윈스턴은 대답했고, 고문은 다시 시작됐다. 사랑이 윈스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체제는 그걸 꺾어야 했다. 바로 그 자리를 비워야 했다. 고문자는 윈스턴의 몸을 일부러 회복시킨 후 극단적인 공포를 썼다. 윈스턴의 얼굴에 꼭 맞게 제작한 기구와 연결된 우리 안에 커다란 쥐를 넣어두었다. 당은 알고 있었다. 쥐는 윈스턴의 근원적 공포였다. 우리의 문이 열리면, 굶주린 쥐가 곧 윈스턴의 얼굴을 파먹을 수 있도록 고안돼 있었다. 볼이나 코, 눈이나 혀.
“줄리아한테 하세요! 줄리아한테! 제게 하지 말고 줄리아한테 하세요!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도, 살갗을 벗겨 뼈를 발라내도 말예요. 저는 안 돼요! 줄리아한테 하세요! 저는 안 됩니다!”
섹스도 저항이었으니까, 윈스턴은 어쩌면 사랑만이 무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항은 잡혀 오는 순간 끝났다. 사랑을 배신하자 자아가 침몰했다. 거대한 공허만 남았다.
스스로 하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통제하기 쉬운 경우가 또 있을까? 스스로 망가졌다고 생각하면서 가라앉는 사람을 위해 손을 뻗어줄 시대도 아니었다. 그런 시대가 있긴 있었을까? 지금은 다를까? 그 자리에 당이 주입한 건 지배 권력에 대한 복종 그 이상, 체제와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그래야 시대가 원하는 수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잠자코 노동자로 사는 것, 모범 시민의 조건이었다. 2018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마침내 고문의 완성이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