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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성 Oct 07. 2018

선생님, 저도 요가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대답을 들었던 때, 내 삶의 방향이 아주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수련은 일주일에 세 번씩이었다. 지난주에 두 번 수련했다면 이번주에는 네 번 가려고 했다. 내가 정해놓은 규칙, 건강한 강박이었다. 우리 요가원은 4층과 5층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 한 발을 내딛을 때부터 마음이 평화롭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의 느낌이 질릴 틈도 없이 사랑스러웠다. 공간의 에너지로부터 깊이 보호 받는 느낌,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평화가 매번 새롭게 차 올랐다. 요가에 호기심이 생긴 어떤 사람과는 이런 문답을 나눈 적이 있었다.


“요가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요?”
“요가는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딱 수련하는 만큼 달라져요. 그게 좋아요, 정확하니까.”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 전 시간 수련을 마친 수련생들이 맑은 얼굴로 길을 나서고 있었다. 숱한 식당과 술집 사이, 그렇게 깨끗한 표정들이 나의 가로수길 풍경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의 은은한 향냄새, 요가 말고 다른 건 다 잊은 채 집중할 준비가 된 사람들과 함께 나는 매번 충만하게 위로 받고 있었다.


그 날도 다르지 않았다. 저녁 수련 후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카운터에서 락커룸 열쇠를 선생님께 돌려드리고 나설 때, 지도자 과정을 함께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지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멈칫했다.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오토바이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거나,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얼굴을 갑자기 마주쳤을 때 그러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한참 들여다 봤다. 국제 공인 지도자 자격증, 200시간, 매주 토요일 오전부터 저녁까지, 4개월 동안 진행되는 코스라는 설명 하나하나가 머리에 박히기 시작했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 돌아섰다.


“저, 선생님. 지도자 과정 있잖아요?”


선생님 눈동자가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웃으면서 끄덕이셨고, 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럼요!”
“그런데 몸이, 마음은 있는데 제 몸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요. 아직 머리서기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고.”
“우성씨,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열심히 했잖아요? 하면서 많이 변할 거예요. 누구나 그렇게 시작해요.
“그런데 선생님, 매주 토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련하는 거예요? 하루에 6시간씩 막 수련하는게 가능해요?”

사실이라면 그렇게 두려운 주말이 없을 일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만 수련해도 다 산 것처럼 노곤했는데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이어지는 수련이라니. 거의 입대하는 심정으로 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얼굴에는 미소가 여전했다.


“토요일은 철학, 해부학, 실기를 배울 거예요. 수련은 평일에 해야지. 거의 매일 해야 해요. 그래야 효과가 있어요. 열심히 하는 분들은 하루에 두세 시간씩 수련해요. 그럼 지도자 과정 끝날 때 즈음에는 몸도 마음도 정말 좋아져 있죠. 그런데 우성씨, 요가를 가르치고 싶은 생각도 있는 거예요?”


아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시작했고, 매료 됐으니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만났고, 호감이 생겼으니 매일 만나서 더 알고 싶었던 그 사람처럼. 하지만 준비가 됐다면 피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누고 싶기는 해요. 좋아하니까.”
“오케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좋을 거예요.”


사실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일이었다. 두려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요가 수련은 두려움과 평화의 현란한 조합 같은 시간이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매일 두려웠고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저 집중했다가, 평화는 다 끝난 후에야 만끽할 수 있었다. 몸은 그 과정 속에서 천천히 변할 일이었다. 수련한만큼 진보할 거라는 믿음에는 수학적 근거가 있었다. 내 몸도 정직한 각도로 우상향 하는 함수 그래프처럼 나아지고 있었다.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월간지 기자의 일상은 불규칙했다. 행사와 출장, 섭외와 촬영 사이에 원고를 마감하는 하루였다. 남는 시간에는 다른 매체를 위한 원고도 썼다. 나는 자동차를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니까, 관련한 컨설팅 요청이 들어오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응했다. 지금까지의 요가 수련은 그 첨예한 틈바구니에서 심호흡 하듯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잠수하다가 수면 위에서 가까스로 쉬는 큰 숨이었다.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려면 일상의 중심축을 옮기는 각오가 필요했다. 비율을 조절해야 했다. 일을 줄이고 수련에 집중하는 시간을 늘여야 했다. 시작할 수 있다면 대충하고 싶지 않아서, 계산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뺄 수 있는 일을 구분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말 한 나절을 규칙적으로 비울 수 있는 방책도 설계하고 있었다. 그날, 요가원을 나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미 이런 계획을 짜고 있었다. 수련을 마치고 유연해진 몸과 마음으로,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어쩌면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던 시기였다. 모든 걸 새롭게 만들고 싶었던 의지로 충만했다. 어쩌면 종이 잡지 자체를 새롭게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위치, 충분한 경력이었으니까. 그런 채 한 순간도 일을 가볍게 여긴 적이 없었다. 일상의 모든 시간이 일이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게 기획이었다. 한가롭게 남는 시간은 죄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표정부터 망가지고 있었다고, 친구는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얘기지만 너 그때 얼굴 장난 아니었어. 진짜 어둡고 우울했어. 보는 사람마다 ‘우성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어.”
“우성이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왜 우성이한테 안하고 너한테 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물어볼 수가 없었대. 얼굴만 봐도 너무 날카롭게 날이 서있어서.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 정도였을까?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심스러워 할 만큼? 혹시 내 몸은 다 알고 있었던 걸까? 내 몸은 그때 단단하게 불어 있었다. 모양이 무너진 게 아니었다. 그대로 팽창한 느낌이었다. 구조는 완전히 같은데 평수만 다른 아파트가 된 것 같았다. 1년 전에 좋게 입던 재킷을 입었는데 묘하게 빵빵했다. 전체적으로 거대해져 있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 그때 너 요가 아니고 웨이트 트레이닝 받는 줄 알았잖아. 근육이 막…”


일에 대한 내 의지만큼 일정도 복작거리던 시기였다. 일은 일대로, 몸은 몸대로 맘껏 팽창하게 내버려 두었다. 들어오는 일을 모조리 처리하면서 저녁마다 누군가를 만났다. 일주일에 4일 정도는 술을 마셨다. 즐기면서 내려놓는 정도가 아니었다. 매번 꽤나 취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밤이었다. 그게 열심히 사는 30대의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를 꽉 채워 혹사시키면서, 그렇게 취해 잠들면서, 조금씩 망가지는 몸을 보고도 ‘허허’ 웃을 줄 아는 삶이 어른의 것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누가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날이 서 있었던 거였다. 돌이켜보면 무슨 안개처럼 뿌옇게 우울했던 시간이었는데, 억지로 버티려니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혹시 그때 내 몸과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건 독 아니었을까? 근육도 지방도 아닌 채, 해롭게 사는게 정상인 줄 알았던 마음의 독. 그래서 탱탱 부어 있었던 걸까?


돌이켜보면, 그때 결정했던 요가 지도자 과정은 스스로 내린 해독 처방 같았다. 의지와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삶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계기를 스스로 마련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명분이 뚜렷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4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한 나절을 요가원에서 보내야 하는 일정이었다. 출장, 인터뷰, 촬영이 겹쳐도 안 됐다. 한 번 놓치면 따라갈 수 없는 엄격한 수업이었다. 지도자 과정 마감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스케줄을 다시 짜야 했다. 수련도 더 열심히 해야 했다.


어쩐지 버거운 것 같아서, 몇몇 가까운 사람에게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요가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려고 한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그냥 더 알고 싶어. 평생 좋을 것 같아. 요가는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른다고 쇠퇴하는 게 아니잖아? 오히려 점점 더 깊어지고 좋아지는 거니까. 다른 모든 게 나빠져도 요가 하나만은 좋아질 것 같아. 혹시 또 알아? 국제 지도자 자격증이니까 나중에 다른 나라 어딘가에서 가르칠 수도, 그렇게 길게 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지.”


반응은 담백하지 않았다.


“하하하, 내가 너 같은 몸매를 가진 요가 선생님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진짜? 가능하겠어? 이제 요가 선생님 되는 거야? 막 박스 안에 들어가는 거야?”
“지도자? 회사 그만 두는 거야? 드디어? 요가원 차리는 건가!!!”


말에는 악의가 없었지만 크고 작은 상처는 다양하게 받았다. 가볍지 않은 편견이었다. 부끄럽게 몸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요가를 이용하는 미디어와 개인은 언제나 있었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의 요가는 서커스에 가까운 명절 엔터테인먼트였다. 조그만 플라스틱 박스에 몸을 구겨 넣고 박수 갈채를 받았던 사람의 이름은 ‘요기 다니엘’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내 의지와 투지도 그만큼 선명해졌다.

“저, 지도자 과정 등록할게요. 한 번 해볼게요.”


상담 이후 첫 번째 수련을 마치고 나서였다. 그날도 많은 땀을 흘린 후였다. 몸은 몸대로 강해져 있었고, 마음은 전에 없이 후련했다. 가고 싶었던 길을 마침내 걸을 수 있게 됐을 때 느껴지는 자유. 꽉 막혀 있었던 것 같은 일상의 어떤 부분이 제대로 열리고 있다는 작은 확신이 있었다.


“오! 잘 생각했어요. 이제 지도자 과정 시작하면 ‘선생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우성 선생님.”
“네? 아직 선생님 아닌데요?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 하면, 다 마치고 나면 선생님이 될 거니까요.”


7월, 여름이 점점 깊어지는 문턱에서 했던 결정이었다. 모든 과정을 수료했던 건 이듬해 1월이었다. 자상하고 엄격한 세 분의 선생님, 열명 남짓한 동기들과는 매 주말 이른 아침에 만나서 저녁에 헤어졌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 겨울을 같이 보냈다. 극심한 긴장과 달콤한 이완 사이,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경험과 감정 사이에서 우리는 참 많이 웃었다. 가끔은 울기도 했다. 무수히 많았던 쉼표와 거대한 느낌표의 계절. ‘선생님이 된다’는 말의 무게를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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