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공자 열전 魏 公子 列傳.
오늘 읽을 <위 공자 열전>은 앞서 읽었던 <맹상군 열전>, <평원군 우경 열전>과 함께 전국시대에서 선비와 식객을 양성하여 이름을 떨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위 공자 열전>에 이어서는 <춘신군 열전>을 읽을 예정인데, 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 등 4명을 묶어 '전국시대 사공자 戰國時代 四公子'라고 부른다. 이 4명의 공자 가운데 사마천은 '신릉군 무기信陵君 無忌'에 대해서만 '위 공자 열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우리 함께 살펴볼까?
자,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서 <위 공자 열전> 두 번째 문단을 읽어보자. "공자는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예의로 대우했다. 선비가 어질든 그렇지 않든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사귀고, 자기가 부귀하다고 해서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었다. [그의 어짊에] 선비들이 사방 수천 리에서 앞을 다투어 몰려와 공자에게 몸을 의지하여 식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 그 무렵 제후들은 공자가 어질고 식객이 많음을 알고 섣불리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지 않은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사마천은 그를 어질다고 표현했다.
신릉군 무기는 푸줏간에 숨어 사는 어질고 "힘이 장사"인 백정 '주해'에게도 예를 갖춰 대했다. 위나라가 조나라와 협상을 맺을 무렵, 신릉군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백정 주해에게 동행을 부탁했고 자기를 알아준 주해는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시장에서 칼을 휘둘러 짐승을 잡는 백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께서 몸소 자주 찾아 주셨습니다. 일일이 답례하지 않은 까닭은 하찮은 예의 같은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공자께서 위급한 처지에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제가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신릉군은 처음처럼 계속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의 빈객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이라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 입장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져 공로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 신릉군은 위나라 군대를 총괄하는 '상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사마천의 평가대로 그는 계속 어질고 겸손했지만, 자리를 얻지 못한 빈객들은 계속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마지막 문단을 읽어볼까? "위나라 왕은 날마다 공자를 헐뜯는 말을 듣다 보니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자는 자기가 모함 때문에 쫓겨난 것을 알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빈객들과 밤낮으로 술자리를 벌여 좋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가까이했다. 이렇게 밤낮으로 즐기고 마시기를 4년이나 계속하더니 결국 술병으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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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했으나 모함으로 자리에서 쫓겨나고, 화병 때문에 술병이 나서 죽은 신릉군 무기. 사람일은 참 알 수 없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다음 시간에는 전국시대 사공자 가운데 마지막 인물을 다룬 <춘신군 열전>을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