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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율의 독서 Sep 22. 2022

김훈, <하얼빈>.

어지러운 말, 가지런한 말.

이토는 말이 많았다. 그가 대한제국 순종을 수행해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에 닿았을 때, 부두에는 제국의 기함 아즈마호가 욱일기를 단 채 꼿꼿이 정박해 있었다. 이미 망해버린 조선의 백성들은 제국의 이토가 제국의 순종을 인질로 잡아갈 것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땅바닥에 박은 채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토는 기마헌병대에게 사정을 물었다. '무슨 소란인가?' "저들은 조선 군주가 납치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는 정보관리의 대답에 이토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가엾고 무지한 백성들이구나.' 헌병대가 병력 동원 여부를 묻자 이토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상서롭지 못하다. 다만 부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

  

이토는 말이 많았다. 그가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을 마치고 본국의 추밀원 의장직에 내정되었을 때, 이미 망해버린 조선의 대신들은 늘 그랬듯 꼬리를 흔들며 송별연을 준비했다. 이토는 준비한 게 많았지만, 잔치는 이토의 기대만큼 유쾌하지 않았다. 이토는 늘 그랬듯 남산 아래 천진루라는 요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토는 내실로 들어가 머리에 윤기가 흐르는 조선인 기생에게 말했다. '몇 살이냐?' 스물다섯이라는 기생의 대답에 이토는 다시 물었다. '경도는 순조로우냐?' "기생이 경도라는 말을 몰라서 이토를" 쳐다보자 이토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웃음은 "칼로 끊듯이" 이내 사라졌고, 이토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기생을 안고 쓰러졌다."


이토는 말이 많았다. 참모들이 준비한 송별사가 성에 차지 않자 이토는 직접 만년필을 들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제국은 동양천지에서 고래古來의 거악과 싸워가며 이 구조물을 제작하고 있다. 이것이 동양 평화의 틀이고 조선 독립의 토대이다. 조선은 스스로 이 틀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 황제와 백성이 함께 신생을 도모할 수 있다. 헛된 힘을 쓰지 마라. 쉬운 길을 두고 험로로 들어가지 마라. 제국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조선은 닦여진 길로 들어오라. 조선이 평화와 독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길은 제국의 틀 안으로 순입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독립이고 동양의 평화이다."  


안중근은 말이 적었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마나베 재판장이 안중근에게 말했다.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지금 진술하라.' 안중근은 말했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 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김훈 작가는 독자들이  책을 읽고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을 생각할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독자들이  책을 읽고 반일 감정이 생기는 것을 염려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며 평화사상은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고, 짙은 반일 감정과 함께 이미 망해버린 조선의 왕과 글깨나 읽었다는 조선의 유생들을 계속 떠올렸다. 이토가 죽자 순종은 안중근을 역도逆徒라 일컬었다. 조선의  있는 자들은 "사죄단, 위문단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가면서  여행 비용을 주민들에게 걷었다.  있는 자들이 모여서 이토의 죽음을 사죄하러 일본에 가려고 13 도일渡日 대표단을 결성했다." 이토가 말이 많았던 이유는 모두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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