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염 열전 蒙恬 列傳.
오늘 우리가 만나볼 사람은 진나라 사람 몽염이다. 사마천은 <이사 열전>에서 이 몽염과 그의 아우 몽의를 등장시켜 조고 · 이사와 대립되는 인물로 이 형제들을 그렸었는데, 오늘 읽을 <몽염 열전>에는 이 몽염을 또 어떻게 기록하고 평가했는지 한번 살펴보자. 단면만 봐서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에 <논어論語> 학이편의 문장을 하나 읽고 그 뜻을 생각해볼까?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인간에게서 인의 덕을 찾을 수는 없다."
<몽염 열전> 첫 문단을 읽어보자. "몽염은 그 조상이 제나라 사람이다. 몽염의 할아버지 몽오는 제나라에서 진나라로 와 소왕을 섬겼으며, 관직이 상경에 이르렀다. 진나라 장양왕 원년에 몽오는 진나라 장수가 되어 한나라를 쳐서 성고와 형양을 빼앗고 삼천군을 두었다." 여러 이름이 마구 나오는데, 우리 복습하는 마음으로 기억을 한번 되살려볼까? '소왕'은 <범저 채택 열전>에 나왔던 그 소왕을 가리키고, '장양왕'은 <여불위 열전>에 나왔던 그 자초를 말한다. 이 문장에서는 몽염이 진나라 장군으로서 공을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계속 읽어보자. "시황제 26년에 몽염은 가문 대대로 장군을 지낸 관계로 진나라 장수가 되어, 수도 함양을 다스리던 행정 장관인 내사內史로 임명되었다." "시황제는 몽씨 형제를 매우 존중하고 남다르게 아끼며 (그들을) 신임하고 현명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몽의를 가까이하여 그 지위가 상경에 이르게 하고, 밖으로 나갈 때는 수레를 함께 타고 궁궐로 들어와서는 늘 곁에 두었다. 몽염에게는 궁궐 밖의 일을 맡기고 몽의는 늘 궁궐 안에서 계책을 짰으며 [둘 다] 충신이라는 평을 받으니, 여러 장수와 대신들도 감히 그들과 다투려 하지 않았다."
몽염과 몽의는 승승장구, 무운장구 했을까?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운명은 시황제의 사망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시황제가 순시 중에 사망하자, 조고와 이사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여 '사리에 어두운' 호해를 이세황제로 옹립하고, '사리에 밝은' 시황제의 맞아들 부소를 자살로 몰고 갔다. 몽염과 몽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고의 모함과 밀고는 몽씨 형제들에게도 향했다. 조고는 이사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없는 말을 꾸며 내어 몽씨 형제를 옥에 가두게 했고 끝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혼군昏君 호해는 조고가 시키는대로 했다.
몽염은 환관 조고와 혼군 호해 때문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일까? 사마천의 평가는 또 다르다. <몽염 열전> 마지막 문장을 읽어 보자. "진나라가 처음 제후를 멸망시켰을 때 천하의 민심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전쟁의 상처도 채 가라앉지 않았으나, 몽염은 이름 있는 장수로서 이러한 때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늙은이를 모시고 고아를 돌보며 모든 백성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히 간언하지 않고 도리어 [시황제의] 뜻에 영합하여 공적을 세웠으니 이들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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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에게는 몽염이 충신이었다. 진나라에서도 몽염은 충신일 수 있다. 하지만 사마천은 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 명령과, 이 명령을 받들어 백성을 징발하고 그들을 강제 노역케 한 몽염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이었다. 아빠는 잘 모르겠다. 평생 군인으로 살았던 사람이, 대의를 스스로 판단하여 군주의 명을 거스릴 수 있었을까? 몽염에게는 어떤 태도가 충성이자 정의였을까? 다음 시간에는 <장이 진여 열전>을 함께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