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 인생 한 권의 책은 <길가메쉬 서사시>이다. 고전古典 중의 고전이기도 하고,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안내서이기도 하며, 좋은 습관을 안내하는 지침서이기도 하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건 말 그대로 '오래된 책'이라는 의미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원형은 지금으로부터 약 4600여 년 전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뀌기도 했으나 그 원형은 2022년에도 그대로 살아있다. 또한 시대를 뛰어넘는 삶의 지혜가 곳곳에 담겨 있고, 고전이 갖추어야 하는 구조가 잔뜩 스며 있다. 고전 중의 고전古典인 이유이다.
가장 먼저 '운명'을 배웠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때가 다를 뿐 너나없이 죽는다. 무언가에 달려들어 뭔가를 이루더라도, 죽을 때는 빈 손으로 가는 것이기에 겸손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이런 문장이 있었다. "길가메쉬, 자신을 방황으로 몰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또 이런 문장도 있었다. "길가메쉬, 너는 쉼없이 고생하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고생 끝에 네 자신이 완전히 지쳐버리면, 너는 네 몸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고 너의 긴 인생 항로를 조급히 끝내는 길로 접어든다!"
다음으로 '덕목'을 배웠다.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났기에 배워야 한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또 누군가와 부딪치며 살아가기에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 이런 문장이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신분이 고귀하다 할지라도 지혜가 몹시 부족하면 운명이 자신을 삼켜버려도 운명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이런 문장도 있었다. "길가메쉬여, 얼마나 오랫동안 주무실 겁니까? 당신과 동행한 당신의 도시에서 나온 아들들을 산 아래에서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어머니들이 도시의 광장에서 실을 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광활한 땅 위에 있는 모든 지혜의 정수精髓를 본 자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경험했으므로 모든 것에 능통했던 자가 있었다. 지혜는 망토처럼 그에게 붙어 다녔기에 그의 삶은 지극히 조화로웠다. 그는 신들만의 숨겨진 비밀을 알았고 그 신비로운 베일을 벗겨냈으며, 홍수 이전에 있었던 사연을 일러주었다." 옛 사람들이 4600여 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주고 받던 말들 가운데, 그 중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았던 말들 가운데, 나는 무엇보다 '경험'과 '조화'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번역한 김산해 선생의 부고를 뒤늦게 들었다. 이 책을 펴낸 휴머니스트 출판사는 2022년 11월 4일에 이런 추모글을 남겼다. "2021년 11월 6일, 수메르 문명 연구에 온 생애를 바친 저자 김산해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년이 흘렀지만, 인류의 모든 최초를 찾기 위해 전 세계의 수메르 자료를 구하고 설형문자 점토판을 손수 해독하던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과 굳은 결의가 그립습니다. 전생이 있다면 자신은 수메르인이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