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이유.
2011년 8월 4일 일기에 이런 게 적혀있다. "해군사관학교 국사담당 교관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고 한다. 웃기는 일. 이래저래 군대는 멍청이들의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내 군대 경험도 한몫했을테지만, 나는 당시의 정권을 대단히 하찮게 여겼었다. 그 전해, 2010년 3월 26일에는 천안함이 침몰했고, 11월 23일에는 연평도가 피격됐다. 해마다 플래너에 이 두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2011년 8월 7일 일기에는 이런 게 적혀있다. "이상은의 골든 디스크 첫 음악이 좋다. 영화 <Finding Forrester>에 나온 'Over the rainbow' 아닌가."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고, <파인딩 포레스터>는 특히 강렬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의 가방에는 작고 긴 공책들이 늘 여러권 있었고, 그는 늘 무언가를 기록했었다. 그 영화를 본 뒤부터, 나는 메모장을 가지고 다녔다.
조경국 작가의 <일기 쓰는 법>을 후루룩 읽다가 지난 메모장들을 꺼내봤다. 2010년부터 무언가 기록되어있다. 그날그날 할 일을 적었고, 했으면 글자 가운데로 줄을 쫙 그었다. 2011년 메모장부터 일기같은 게 적혀있고, 2013년까지 기록되어있다. 별 내용은 없다. 2014년부터는 일정 위주의 기록이 있고, 2017년까지 비슷한 크기의 메모장을 사용했다. 2018년부터는 메모라 할 만한 게 없다.
2018년부터는 플래너에도 별 기록이 없다. 정성들여 쓴 것은 산부인과 진료 기록, 딸아이 병원 진료 기록뿐이다. 2014년부터 기록한 필사, 초서책은 2018년, 2019년 두 해 모두 앙상하고, 2020년은 아예 건너뛰었다. <일기 쓰는 법> 71쪽 문장이 가슴 아프다. "하루 내내 이런저런 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치이고 시달리다 보면 스스로 되돌아볼 시간도 없게 마련입니다."
초서는 2021년에 다시 시작했다.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한 뒤였다. <일기 쓰는 법> 71쪽을 다시 읽는다. "일기를 꼬박꼬박 쓴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미리 말해 두고 싶군요. 대신 일기를 쓰는 동안 '자신'을 지킬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일기를 쓸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작가의 '들어가는 말'을 다시 읽어본다. "일기는 현재의 나를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