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당연한 이치다. 이를 거스르는 콩과 팥은 더이상 콩과 팥이 아니다. 말도 그렇다. 이치에 맞는 말을 연습해야 이치에 맞는 말을 할 수 있다. 글도 그렇다. 이치에 맞는 글을 익혀야 이치에 맞는 글을 쓸 수 있다. 언어라는 게 그렇다. 언어는 표현이자 수단이다.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언어이고, 언어는 소리와 문자라는 도구로 표현된다. 결국 이치에 맞는 언어를 쓴다는 건 이치에 맞는 표현과 수단을 제대로 사용한다는 말이고, 이치에 맞는 표현과 수단을 알맞게 사용하려면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한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가 맞다. '사물존대'라는 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이 말을 사용하는 직원도 알고 있지만, 감히 '나왔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사람도 자신의 커피가 '나오셨다'는 게 말이 안 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나왔다'고 하면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원인은 커피를 만들고 파는 가게 내부에 있다. 커피를 낼 때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라는 말을 손님에게 하라고, 사장이 직원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호칭을 생략하고 말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이전 직장이 딱 그랬다. 일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뭐라고 했다. 뭐라는 말인지도 몰랐고 나에게 하는 말인지도 몰랐는데, 얼마 뒤 더 큰 소리로 '이건 뭔가요?'라고 했다. 거기다가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업무 방향을 정할 때 '이거 해야할 것 같은데'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개 씨, 이건 뭔가요? , '아무개 씨, 이건 이렇게 해봅시다' 라는 표현이 이치에 맞는 말하기 방식이다.
직업을 문장의 주어로 쓰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말과 글을 풀어내는 게 주요 임무인 기자들이 특히 그렇다. '기자는 모월 모일에 어디를 취재했다' , '기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라고 쓴다. 더한 사람은 '기자는 참담했다' 라고도 쓴다. 정말 참담한 표현이다. 기자들이 스스로 동급이라 여기는 정치인과 법조인과 기업인도 그렇게는 표현하지 않는다. 막 나가는 재벌 3세도 자신의 직업을 문장의 주어로 쓰지는 않는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고 하는데, 말을 자주하고 객관성과 정의감까지 추가되니 갈수록 태산인 것이다.
좋은 말을 배우고 익혀야 좋은 말을 한다. 좋은 글을 배우고 익혀야 좋은 글을 쓴다. 배우고 익혀도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틀리면 또 배우고 익히면 된다. 중요한 건 '역지사지'다. 내가 들었을 때 기분 나쁜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신지영 교수의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라는 부제가 붙은 <언어의 높이뛰기>는, 바로 이런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들을 설명하는 책이다. 아메리카노 이야기는 이 책 3장에 나와있고, 나머지 2가지 예시는 내 경험을 풀어낸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