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것, 변하는 것.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를 겨우 다 읽었다. 재밌는 문장도 많았지만 지루한 문장도 많았다. 익숙한 단어를 읽을 때는 공감이 되었지만, 낯선 단어를 읽을 때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건너뛴 부분도 있었지만 학생의 자세로 꾸역꾸역 일독을 마쳤다. 622쪽이나 되는 이 두꺼운 책에서 비문이나 오타를 발견하지 못했다. 번역은 유려했고 편집은 꼼꼼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들의 시각에서 새롭게 배운 게 있었고, 단단한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출판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은 교과서다. 저자들 모두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고,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인류의 역사를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까지 기술하고 평가했다. 1부의 제목은 "유인원에서 알렉산더까지"이며, 2부에서 4부까지는 차례대로 "세계인들의 사상과 행동", "유럽", "용감한 신세계"이다. 2부는 고대 문명과 중세 이슬람 등 동서양의 문명들을, 3부는 근대 유럽의 과학혁명을, 4부는 산업혁명 이후 현대까지 "용감하지만 불안한" 과학과 기술의 세계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의 한 문장으로 고른 표현은, 찰스 다윈을 묘사한 485쪽 가운데 부분에 있다. "사실상 그의 운명은 확고한 신념의 부재 때문에 결정되었다." 다윈은 '확고한 독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저자들의 부연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다윈은 결국 오로지 엄청난 지적인 노력만으로, 지구의 물리적 특성이 변화하면, 식물과 동물도 그에 맞추어 변화하지 않는 한, 한때 잘 적응했던 존재라 하더라도 잘못 적응한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저자들은 이 책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순환적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현재는 과거와 다르고, 미래는 현재와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운 것은 미래를 이해하는 데 제한적으로만 유용할 것이며,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더더욱 제한적인 힘만 발휘할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이해해가면서 조금 더 편리해져갔다.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해갔고 때로는 이론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무대와 같고, 그래서 영원한 건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은 과학과 기술이다. 과학과 기술은 '정부'와 '산업'이라는 조연의 도움을 받아 역사를 앞으로 이끌기도 했고 나락으로 빠뜨리기도 했다. 인류에게 더 많은 밥과 고기를 선사하기도했고 더 잔혹한 칼과 무기를 선사하기도했다. 세상을 잘 만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즐겁게 연구를 하고 도구를 만들었지만, 세상을 잘못 만난 이들은 함부로 쓰여지고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중요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고집을 부리는 건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매우 위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