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는 오래도록
안정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삶이 고요해지면,
이대로 괜찮은 건지 의심이 먼저 들었다.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불안했다.
아무 일 없는 하루는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았고,
안정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호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종종 사고를 쳤다.
나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돕겠다고 나서곤 했고,
갑자기 스스로를 혹사시키듯
무언가에 과하게 몰입했다.
나는 무의미한 전쟁을 위해
시간과 몸을 제물로 바치며 몸부림 쳤다.
공복에 진하디 진한 커피를 마셨다.
매일 잠을 줄여가며 무언가를 해야했다.
남들이 잘 때, 나는 깨어있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놓였다.
부시맨 브레드 100개.
쫀드기 100개.
라면 80봉.
식빵 10줄.
한 가지 음식을 대용량으로 저렴하게 샀다.
원푸드 파이터처럼 그걸 한 달 꼬박 먹었다.
거기에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커피를 곁들였다.
2리터 정도.
물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한 가지 음식만 주구장창 먹으면서도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기 위한 판단이었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행동했을 뿐이었다.
친구들은 그걸 볼 때마다 뒷목을 잡았고,
음식을 뺏어가거나, 배달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땐 그 호의가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이런 행동이 자기 학대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불안이 사라지면
나는 버틸 수 없었다.
항상 긴장 상태여야 안심했다.
남들이 자는 시간까지 알차게 써야
도태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매 순간을 투쟁해야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이 있어야 빛나는 사람이고,
사람은 결과가 있어야 존재의 승인을 받는 거라 믿었다.
나는 쉴 줄 모르는 사람으로 자랐다.
청춘은 평생에 나눠 써야 할 체력과 기력을
미리 가불해 쓰는 시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꼭 나를 두고 한 이야기 같았다.
나는 너무 앞당겨 써버린 것들로
이미 조금씩 망가진 상태였지만 외면했다.
온몸이, 정신이 다 박살이 났다.
각종 의사들의 경고가 이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몸을 방치했어요?"
의사의 질문에 나의 답은 하나였다.
"버틸 만했어요.
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게 아픈 건지 인식을 못했어요."
진짜 그랬다.
나는 아픈 걸 잘 인식 못했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토를 했는데,
피가 나와서 "어라?"해서 병원에 갔다.
이미 그 전부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손발이 떨리고, 식단을 해도 살이 쪘다.
그게 갑상선 호르몬 문제인지 몰랐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이상함을 감지해놓고,
음, 이 정도는 뭐, 하면서 방치하다
병이 커지고 나서야 허겁지겁 수습했다.
"혹시 죽으려고 병원에 안 왔던 건가요?"
라는 질문을 한 의사 선생님이 있으셨는데,
그땐 진짜 상태가 안 좋았는데 전혀 인지를 못했을 때라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살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제야 난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를 아껴 써야 할까. 하고.
문제는, 내가 용인하는 한계와
내 몸이 용인하는 한계의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다.
최근에 식단과 러닝을 병행했는데,
계속 살이 찌기만 했다.
알고 보니, 러닝을 할 몸 상태가 아니었다.
정신은 이해했지만,
몸과는 아직 협의가 끝나지 않았다.
내 정신은 괜찮다. 버틸 수 있다.였지만,
몸은 못 버티겠으니 제발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신호를 아예 무시했을 테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나를 밀어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간극을 인정했다.
여전히 몸과 협의는 잘 안 되지만.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경계심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 중이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붙이지 않는다.
거창한 이유를 만들지 않는다.
그저 묻는다.
내가 이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나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지자
불안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가족과는 선을 그었고,
불필요한 일들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군가가 나를 흔들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흔들어대지 않는다.
평온함이 찾아들었다.
한겨울과 한여름만 오가던 삶에
요즘은 봄과 가을 같은 날도 있다.
안정은 지루함이 아니었다.
안정은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삶이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안정을 즐기지 못한다.
여전히 과하게 몰입해서
며칠씩 밤새고 싶은 날도 있다.
괜히 나를 학대하고 싶은 날도 있다.
그러나 반복하지 않는다.
충동을 의식하지 않고,
매일의 안정에 충실한다.
물론,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게 가장 필요한 결정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