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정체성, 존재의 의미는 세상에 없던 비즈니스라는 데 있지않을까
매년 3월에(우리회사 기준) 연봉 인상 정보를 보면, 분명 내 연봉은 올랐는데 내 계좌에 찍힌 돈은 뭐가달라졌는지 모를 때, 인사시스템에 접속해보면 수많은 공제항목들을 나열하며 무엇에 쓰이는지 모를 세금 때문이라고 적혀있었다. 보면서도 불가항적인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별 의구심 없이, 항상 대한민국 사람이면 똑같이 적용되는거겠거니 하며 의문점을 갖거나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잔소리처럼 온실 속 화초로 자라서 그런건지, 아직 30년을 살면서 한번도 사업자등록유형, 세금이나 기업의 지배구조 같은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비단 나뿐만일까? 싶기도 하다. 대부분의 평범하고 무탈하게 살아 온 사람들이 자영업을 하지 않는 한 나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회사가 자동으로 알아서 세금을 공제해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이미 오래전 태초에 사업체가 형성될 시기에 누군가는 이 사업이 어떻게 수익을 창출하고 어떤 형태의 사업인지에 대해 정의내렸고, 기업의 자본의 출처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지배구조를 형성하여 최대한 사업을 영위하기 용이하게 판을 짜뒀기에 가능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몇달 전의 나처럼 사실 전혀 몰라도 되는 영역이다. 그런데 나처럼 어느날 갑자기 사내벤처를 시작하여(그래도 사실 아직도 월급받는 직장인이긴 하지만..)누구라도 이미 존재하는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로 수익을 창출하겠다고 하면 아무도 가르쳐주지도 관심도 없지만 이 부분들이 가장 초석이자 필수인 부분이다.
사실 일반적인 유형의 기존에도 영위되던 사업 유형들은 상관없다. 이미 누군가 닦아 놓은대로, 세상이 정해둔 규정에 맞게 따라가면 된다. 그런데 '스타트업 창업'이라는 것의 경쟁력을 판단하는 주축이자 그들의 존재의 이유인 세상에 없던 서비스, 세상에 없던 사업이라면 이 단계에서 갑자기 고난의 어드벤처 게임이 펼쳐질 수 있다. 왜냐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발상일수록 누구도 알려줄 수도, 참고 할만한 사례도 없다. 그리고 사내벤처의 특성상 이런 리스크를 안고 사업을 하기에는 모기업의 가부 결정을 받기도 힘들다. 그러니까 이런 류의 게임은 승률이 낮다. 알고 있었고 그래도 무모하게 부딪혀보자고 주장하던 사람으로서 말못할 막중한 책임감도 있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얘기해보자면 그룹 규모의 대기업들은 대부분 지주회사를 가지고 있고 지주회사와 같이 금융업이 기반이 되는 기업지배 구조를 가진 자회사 계열사에서 또 다시 금융업 사업자를 내기는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기획했던 서비스는 현재 많은 스타트업에서는 통신판매업 정도 신고하고 진행하고 있지만, 우리는 사내벤처로서 이 리스크를 안고 사업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담당자분이 퇴사하기 전까지만해도 로펌을 선임하여, 세상에 없던 개념에 대해 정의내리고 비즈니스를 꾸려가자고 로펌 수임료까지 알아봤지만 오천만원이라는 수임료를 요구했으며 사실 로펌이 도장값으로 제출해 준 금액이지, 법적 규제를 뚫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장담 해주진 못한다는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담당자의 퇴사와 함께, 그런 나름 막대한 금액의 투자를 지금 방향성과 아이디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너희들에게 지금 당장 해줄 수는 없다는 윗선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한번도 법적 규제나 기업의 지배구조 때문에 프로젝트가 위기에 빠질거란 생각은 여기에 온 이후로,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왜냐? 몰랐기 때문이다. 무지에서 오는 예고편 없는 고난은 절망적이였다. 우리는 사업모델을 틀에 맞게 바꿨다. 내 기준에서는 이미 너무 경쟁력을 잃어버린 거 같았다.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은 진척 없는 논쟁 그리고 본사에서는 무얼 하고있는지 답답해하며 우리의 피로도도 높아져만 갔다.
가장 힘든 부분은 내 의지나 컨트롤 범위에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 이런 생각을했다. 만약 내가 사내벤처가 아니라, 진짜 사업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렇게 리스크를 감수할 수 없어서 하지 않았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 했을 거 같다.'였다. 그런데 자신있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그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프로토 타입이라고 부르는 그런 베타 서비스(?)같은것으로 한번 실험을 이러쿵저러쿵 그냥 해봤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정말 자력으로 벤처를 창업한다고 모였다면, 타다나 뮤직카우처럼 이슈가 될만큼 그정도 규모의 성장을 일으켜 법적 문제를 일으키는 꿈같은 일이 일어나게될 리스크보다, 아마 현실적으로 그 단계까지 갈 수 없을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해서 그냥 했을거 같다. 그러나 나는 아까 말했듯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피고용인 입장이였다. 무력했고 별 수 없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업모델을 대거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잡아 먹었고 멤버들과 끝없는 터널 속을 걸었다. 어련히 스타트업들에겐 피보팅이라는 시련이자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 하나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타의적인 피보팅을 거쳤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는 벌써 사내벤처 유효기간 중 반절이나 써버리고 말았다.
글을 늦춘 이유도 터널속에 갇혀 잠시 진전이 없어서 일수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모베러웍스의 책, 프리워커스를 인용하며 나아가지 못하고 갇혀있던 그동안의 시간들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라인을 다닐때 상사분이 종종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수영장 이야기'라며 들려주시곤 했는데, 일을 할 때 수영장 바닥 끝까지 내려가서 동전을 주워 온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동전을 주워 오는가 하면 얕은 수심에서만 헤엄치는 사람이 있다고. 업무가 주어질 때마다 스스로 '수영장 바닥까지 내려갔는가?'를 질문했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완성도의 기준이 됐다.
가끔은 그 누구의 말보다 책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