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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기 May 28. 2024

바위가 되는 법


*[] 안의 내용은 김범의 『변신술(1996)』 중 ‘바위가 되는 법’ 본문 발췌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 나는 줄곧 그대로였다. 부서가 바뀐 적도 없고, 사무실 자리를 이동한 적도 없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이 더 높은 급여를 받고 여기저기 이직할 때도 나는 멈춰있었다. 애사심이 남달랐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게을러서다. 토익 시험을 보고 이것저것 자격증을 따야 하는 지난한 시간을 또 겪기 싫었다. 그럴 의욕과 열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하루를 보내면 월급이 나오는 삶은 안온했다. 그래서 바위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앉거나 눕는 등 몸을 낮추어 하나의 형태를 정하되, 주변 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첫 직장 생활 치고는 제법 적응을 잘한 편일지도 모르겠다. 달리 말하면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다른 부서에서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지나가는 직원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만 잘했다. 업무 성과가 뛰어났다면 유명한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을 것이다. 눈에 띄고자 하는 큰 욕심이 없었으니 묵묵히 내 일만 했다. 가끔은 ‘이게 맞는 걸까?’‘한 곳에 고여있는 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밀려드는 업무의 파도에 생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것만도 벅찼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숨소리를 죽이고 지내던 나의 세상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명(命) 신입사원 교육 담당’. 새로 입사한 사원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부서별로 교육 인원을 차출한 모양이었다. 강당에서 어색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한참 혼자 떠들어야 한다니. 상상과 동시에 피곤해졌다. 결국 내 교육시간은 강의장 대신 식당에서 쓰겠다고 건의했다. 뭐라도 먹게 하면 음식 씹는 동안 내 말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택한 방법이었다. 점심 식사와 신입사원 교육을 한 번에 퉁칠 수 있으니 시간도 절약될 것이다. 얼른 끝내버리고 고요한 바위로 돌아가고팠다.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신입사원들은 봄날의 햇살처럼 눈을 반짝였다. 강의장 밖으로 나와 밥을 먹는 것에 들떠있었다. 기업 목표와 업무 체계 따위의 설명만 듣다가 바깥바람을 쐬니 그럴 법했다.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서인지 질문도 한결 가벼워졌다. 연말 보너스는 얼마나 주는지, 사내연애도 많이 하는지, 어떤 상사를 조심해야 하는지 별별 이야기를 다 물었다. 한여름 매미소리 마냥 뜨거운 질문 공세였다. 내겐 어려운 물음도 아니었으니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즐겁게 대화를 이어갔다. 가을 소풍을 나온 듯 도란도란했다. 마지막 질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한 회사, 한 부서에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었다. 순간 내 이성은 겨울밤 사시나무같이 차가워졌다.


[만일 폭우 등의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 그에 의해 자리가 움직여지거나 아래로 구르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개의치 않고 본래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다.]

어디까지 솔직해도 되는 걸까. 결국 농담인 척 진심을 얼버무렸다. 성공하겠다는 대단한 욕심이 없어서 그랬노라, 존재감이 희미해 회사에서도 나를 옮겨야겠다 생각지 못했으리라고. 뜻밖의 대답에 모두 놀란 눈치였다. 질문을 던진 신입사원은 한자리를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맞는 말이라고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씁쓸한 표정의 선배 직원을 위해 둘러댄 말들이었겠지만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됐다. 고여있던 시간이 틀리지 않았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땅에 닿는 부분에 이끼가 끼거나, 벌레들이 집을 짓게 되면 다치지 말고 보존한다.]

신입사원 교육이 끝날 무렵 가장 유익했던 강의에 투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최다  득표한 맨 위 칸에는 내 이름이 쓰여있었다. 의외의 결과였다. 워런 버핏도 아니고 나와의 점심 식사를 귀히 여겨줄 줄 몰랐다. 결과를 듣고 돌아가는 길에 채용 담당자와 마주쳤다. 나는 왜 내게 신입사원 교육을 맡겼는지 물었다. 담당자는 말없이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신입사원들이 유익한 강의로 선정한 이유를 적어낸 자료였다. 회사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막힘없이 답해주었다, 업무 방식을 상세히 익힐 수 있었다, 어떤 상사가 어떤 소주를 좋아하는지까지 배우게 되어 재밌었다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오랫동안 제자리를 지켜왔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시간은 정직하다. 바위처럼 멈춰있던 와중에도 견뎌낸 시간만큼의 결실을 주었다. 상사가 무슨 일을 던져도 해낼 수 있는 배포가 생겼고, 후배가 무슨 도움을 청해도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직장 생활의 그 어떤 풍파가 나를 뒤흔들려해도 쉽게 널브러지지 않을 것이다. 묵묵히 버텨온 보상이었다. 나의 밑동이 조금 더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이제 나는 바위가 되는 법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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