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무당집 처음이지? 어디로 도망가고 싶어서 조상신을 찾아왔나 보자 어디!”
‘갓 내린’ 무당은 뭐가 달라도 다른 듯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벌써 내 속을 간파했다. 도령님이라 불리는 이 무당은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예지력이 가장 좋을 때라고 했다. 요즘 내 얼굴빛이 어둡다며 같은 팀 선배가 추천해 준 곳이었다.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주말은 이미 세 달 뒤까지 예약 마감이었다. 결국 평일 점심시간에 겨우 짬을 내어 달려왔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도령은 오색찬란한 부채를 촥 펼쳤다. 시끄러워도 조금만 참으라 하더니 부채보다 더 화려한 방울을 한참 흔들었다. 과연 조상신이 어떤 예지를 내려줄지 궁금했다.
도령을 찾아간 이유는 오직 직장운 때문이었다. 결혼 언제 하나 이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가 이 회사에 계속 있어야 할지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야 할지가 궁금했다. 그때 나는 회사 생활에 많이 지쳐있었다. 연차가 쌓이면서 맡은 업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월급은 병아리 눈물만큼 인상되었다. 반복되는 일이 무료했고, 익숙한 사람들이 지겨웠다.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는 주변 동료들을 보니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타이밍에 내게도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 기존에 하던 업무와 비슷한 일이었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의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어떤 선택이 옳은지 알고 싶었다.
“마음엔 화(火)가 많고 직장 자리엔 '죽을 사(死)'가 보여! 운 때가 들어왔으니 얼른 다른 데로 도망가!”
도령은 내게 직장운이 있다고 했다. 평생 일할 팔자인 만큼 좋은 직장 만나는 복은 있다는 거였다. 다만 올해는 직장 자리에 죽음의 글자가 보이니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궁금했던 답을 들었음에도 후련하지가 않았다. 정말 이 회사에 안녕을 고해야 할 순간이 왔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전지전능한 신의 말씀이 그러하다는데 모른척할 수도 없었다. 결국 도령의 예언을 믿고 이직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서류에 적을 경력사항들을 정리하고, 면접에서 얘기할 성과들을 추려냈다. 자연스레 지금까지 이곳에서의 회사 생활을 되짚어갔다. 폴더를 꽉 채울 만큼 쌓인 업무 자료들과 피, 땀, 눈물로 얻어낸 소중한 경험들이 보였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회사에서 고락을 함께한 인연들이 보였다. 익숙해서 지겹다고 여긴 사람들이 이젠 나를 위해 마음을 모아주고 있었다. 도령님을 만난 후 내 이직을 눈치챈 선배는 자기소개서라도 피드백해주겠다며 손 내밀었다. 몇 년 만에 연락드린 옛 상사들은 흔쾌히 평판조회를 돕겠다고 나섰다. 모두가 ‘여기서 조금 더 버텨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덧붙였지만 말이다. 회사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이 인연을 뒤로한 채 떠나려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다고 이직을 포기하자니 신이 점지해 준 운을 저버리는 것만 같았다.
운 때가 오긴 왔던 모양이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치른 전형은 최종 합격이었다. 하지만 축배를 들기도 전에 나의 이직은 슬픈 엔딩을 맞이했다. 이직하려던 회사에 예상치 못한 회계감사 이슈가 터지면서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었다. 지원했던 팀이 해체되어 채용 자체가 아예 없던 일로 되어버린 것이다. 도령도 직장 자리에 보인다는 '죽을 사(死)'가 이런 식으로 들어맞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이직을 위한 발버둥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슬프거나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신은 내가 아직 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여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잊고 있던 나의 가능성을 마음껏 펼쳐보고픈 용기가 생겼다. 그 용기를 발견한 것이 내겐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내게 행운을 만들어준 건 전지전능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일상적 존재, 내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바쁜 시간 쪼개어 자기소개서를 살펴주는 선배, 몇 년 만에 연락했음에도 평판조회를 칭찬으로 가득 채워준 옛 상사들, 내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하기 위해 마음을 다해준 인연들이 있었다. 이들 덕분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만큼 지쳤던 내가 다시 한번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행운이 될 수 있음을. 그 어떤 부적보다 강력한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재만 남은 줄 알았던 마음에 새롭게 불씨가 움트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