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1시 서울 종로구의 한 빌딩에서 50대 여성이 투신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황급히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보던 뉴스 영상에 너무나 눈에 익은 빌딩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하 식당가가 유명해 인근 직장인들의 외식 성지인 곳. 오늘 점심시간에도 다녀왔던 그 빌딩이다.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다. 내가 입안으로 음식을 욱여넣는 동안 누군가는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 검붉은 피를 토했다. 생각할수록 속이 메슥거렸다. 먹은 걸 다 게워버리고픈 충동을 겨우 삼켰다. 다시 조심스레 재생 버튼을 눌렀다.
“여성은 자신이 일하던 사무실 창문을 넘어 투신했으며, 경찰과 소방 등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빌딩 입주사의 직원이었다고 했다. 대기업들이 입주한 빌딩이니 남부러울 것 없는 직장이었을 테고, 50대라면 못해도 팀장급 정도이니 급여가 박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누군가에겐 그녀가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벗어나 창밖으로 목숨을 내던졌다. 단 1분 1초도 견딜 수 없었던 것처럼, 더 이상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뉴스 영상을 잠시 앞으로 되돌린다. 그녀가 떨어진 시간을 다시 본다. 정글 같은 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 끼니를 채워 넣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그녀는 누구와 점심을 먹었을까? 내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여유를 만끽할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하며 숨을 돌렸을까? 질문은 끊이지 않지만 대답해 줄 이가 없다. 목숨이 스러진 자리에 남은 삶의 흔적으로 반추할 뿐이다. 그녀의 유서에는 ‘먹고살기’가 버거웠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경찰은 현장에서 확보한 유서를 기반으로 극단적 선택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사건 경위를 조사 중입니다.”
뉴스에 유서의 일부가 공개되었다. 성과로 모든 걸 말해야 하는 현실이 숨 막힌다, 화장실에 가고 물을 마시는 것조차 눈치가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공개된 부분은 두 문장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에게 회사가 어떤 곳이었을지 느낄 수 있었다. 들숨 한번, 물 한 모금도 허락되지 않는 ‘지옥’이었다.
선혈이 낭자하고 화염이 이글거려야만 지옥인 것은 아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문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써져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녀는 홀로 극단을 선택했던 게 아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이미 너무 많은 극단들로 채워져 있었다. 생존을 위한 작은 여유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유족들은 사망 여성이 평소 실적 압박에 시달렸다며 회사를 상대로 진상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녀에게서 희망이 메말라가는 과정을 상상해 본다. 자신이 맡은 일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까지는 사람마다 속도 차이가 있다. 당장 보잘것없어도 조금만 기다리면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도 한다. 다들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러나 냉정한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더 빨리, 더 많이 실적을 보여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위로의 말이 듣고 싶은 순간이 와도, 회사에서는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50대’ 그리고 ‘여성’. 속을 터놓을만한 동년배 동료들이 사내에 몇이나 남아있을까. 후배 직원들에게 말하기는 더 껄끄럽다. 나보다 월급 많이 받으면서 배부른 소리 한다는 말이 뒤로 돌아오기 십상이다.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스스로를 자조하게 된다. 한번 뿌리내린 자기 비난의 싹은 순식간에 희망을 집어삼킨다.
“이에 사측은 유족이 주장한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다면서도 디지털 포렌식을 의뢰해 사고 경위를 철저히 파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죽은 자의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샅샅이 살피기로 했다. 살아생전 그녀는 거대한 빌딩 안에서 매일 수백 명의 사람과 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이는 없었다. 왜 화장실도 가는 것도 눈치 봐야 할 만큼 실적 경쟁에 내모는 것인지, 물 마시는 여유도 없을 정도로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강요하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성과주의에 눈먼 사회는 그녀의 고통을 그저 뒤처진 자의 업보로 여겼다.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테의 눈에는 참혹한 장면이 펼쳐진다. 무관심한 태도로 악을 방조했던 자들이 벌 받는 모습이다. 그들은 온갖 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쉴 새 없이 살점을 뜯어 먹힌다. 문득 내 살점 위에도 벌레들의 이빨이 꽂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회적 살인을 묵인한 현실에 환멸을 느낀 나는, 그럼에도 큰 소리로 분노하지 못하는 나는 선인가 악인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메스껍게 만든다. 검게 일그러진 속을 다 토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