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른 아침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껴 있다 보면, 제가 하는 일이 과연 이 사람들이 하는 일만큼 가치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곤 했습니다. 창작이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런데 저는 선호도가 높은 예쁘고 행복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아실현일까요? 내 자아실현을 남들이 뭐 하러 봐줘야 할까요?
창작을 그냥 돈 버는 수단 이상의 어떤 소명으로 삼기 위해선 이에 대해 저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체 창작이란 어떤 가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그런 의문에 대해 단서가 되어 준 건, 미술의 역사였습니다. 런던에 있을 때, 저는 참 타이밍 좋게도 미술사에 흥미가 붙어서 온갖 컬렉션의 보고인 내셔널 갤러리나 대영 박물관, 테이트 모던을 수시로 들락거리곤 했는데요, (짧은 유학 생활의 본전은 여기서 뽑았던 것 같아요.) 이전처럼 내 취향의 작품 하나에 꽂히고 오는 게 아니라, 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맥락을 읽는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컬렉션을 보니까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해 왔는지가 눈에 보이더라고요. 고대 미술, 르네상스, 인상주의, 모더니즘… 이런 것들을 이전엔 교과서적으로 외우곤 했는데, 그 사이사이엔 어떤 연속성이 있으며 지금도 거기 속해 있다는 어떤 역사 인식이 처음으로 좀 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들은 연속된 역사의 증거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미술 작품들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의식을 펼쳐놓은 하나의 거대한 지도처럼 보이더군요. 하나하나의 작품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말하는 듯했습니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몰랐는데, 관람객의 입장이 되니까 비로소 예술의 가치가 느껴지더군요. '제가 출퇴근하는 사람들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가졌던 의구심은 역사가 보이고 거기에 작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가 되면서 해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작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도 좀 더 명료해졌어요. 제게 창작의 의미는 ‘현재를 기록한다는 것’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현재의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토기를 만들던 때도 있고 로켓을 쏘아 올리는 때도 있고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우리는 그중 극히 일부, 자신이 경험해 본 시공간밖에는 직접 알 수가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데, 인간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다양한 눈을 통해 여러 스펙트럼을 확인해서 세상이 어떤 곳이라는 걸 알고 싶어 합니다. 그게 인간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십억 개의 타인의 눈에 연결돼서 세상을 보는 점 말이죠. 인간은 타인의 기록을 통해 지식을 쌓고, 타인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면서 더 복잡한 사고를 합니다. 또 타인에게 그 사고를 전달하고 전승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연결 전체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학과 고고학과 철학이 우리가 충분히 먹고 살만 한데도 아직 할 일이 남은 거겠죠? 이렇게까지 하라고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한 존재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는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이 예술이 전체에 하는 역할을 아주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어요. 과학은 가설을 증명하는 방식을 통해 기여하고, 고고학은 발굴하고 추적하는 방식으로 기여하고,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은 그것이 보존한 현실 속으로 언제든 들어가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폴 세잔의 그림 앞에서 저는 낯선 기하학적 배치, 공간 구성, 붓터치와 색상 같은 것들을 통해 그 순간의 세잔이 되어볼 수 있어요. 인상주의 화가들 틈에 눌려,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는 그 분투하는 마음과 캔버스에 붓질을 하는 순간 떠오르는 새로운 관념적 가능성... 이런 것들이 마치 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도널드 저드의 조각을 보면 저도 갑자기 차갑지만 절대적인 순수한 사물성에 마음이 사로잡힙니다. 예술 작품은 그것이 주는 미적 쾌감뿐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전후 맥락과 사회 분위기, 그 작가의 기질과 같은 것을 전부 불러옵니다. 그래서 저와 직접 감각으로 연결되어 제가 평생 해 본 적 없는 경험을 해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술은 이런 경험을 수없이 나열하며 우리가 다른 세상을 보는 창문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답이 있는 게 아니고 이 작가의 이 눈, 저 작가의 저 눈이 다 필요하죠. (물론 그 하나하나엔 충분한 설득력과 내적 완성도가 있어야 하겠지만요.)
저는 창작자의 역할이 자신의 현재를 잘 담아내는 것에 있다고 느낍니다. 이전에는 좋은 작품을 하겠다며 다른 작가의 화보집이나 어려운 미학 서적을 보면서 저를 구성하는 모든 진짜 맥락은 등한시했는데, 원대하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까지 들먹여가며 생각을 이어나가자 결국 창작자에겐 당면한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현재란 시대 배경, 패러다임, 사건, 새로운 기술, 조형 의식과 같은 공동의 것일 수도 있고 기질, 사적 경험, 취향과 같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내가 경험한 현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누군가에게 공유되어야 할 무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담아낼 수 있는 저의 현재는 무엇일까요? 저는 80년대에 태어나 그때의 대중문화를 접했고 빠른 발전을 이룬 경쟁 사회를 통과해 나간 사람입니다. 스토리텔링을 동경하면서 그림을 오래 그렸고, 외국 생활을 종종 했고, 가족과의 내적 갈등이 있었고, 종교적 갈등도 있었고, 그것들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많은 실수를 했고 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제 몸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듯 하지만 우리 전체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보면 너무나 특수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타인에게 필요한, 남들이 보지 못한 저의 현재이며, 제가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요?
저는 꽤 재해석이 많이 들어간 그림을 그리지만, "내가 어떤 경험을 보존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종종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세상을 보면서 느꼈던 균열, 그로 인한 갈등이나 고민, 그리고 튕겨져 나간 저를 끌어당긴 것들, 그리고 지금 AI 시대를 맞이하며 느끼는 황당함과 얼떨떨함과 같은 요소들을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나의 그림 속에 남아있는가?를 보곤 합니다. 그러면 창작자로서 자신을 정의 내리기가 더 수월해지는 것 같습니다. 남을 설득하기도 좀 더 쉬워지고 유행이 바뀌거나 마음이 흔들리거나 할 때에도 좀 더 휩쓸리지 않고 지나가곤 합니다. 무엇을 공부하고 더 채워 넣을지, 앞으로 어디로 갈지 떠올리는 데도 도움이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