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식 Jul 26. 2023

의도에서 의미가 되는 과정

창작자는 어떻게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는가?

뭔가를 그려야겠다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감정, 충동, 쏟아지는 영감, 맴도는 생각 같은 것이 종이와 펜을 들게 만드는, 그런 순간이죠. 참 순수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이 최초의 열망은 이걸 내 눈으로 봐야겠다는 의지를 통해 완성이 됩니다. 상상이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창작은 위대합니다. 나의 의도를 표현하는 것. 창작의 제1 목적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겁니다. 이제 막 펜을 쥐기 시작한 어린아이도, 수업 시간에 연습장을 채우는 학생도, 이런 창작의 가장 위대한 목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작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업으로 삼고 싶은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길 원합니다. 나의 이런 창조적인 의도가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길 바라는 것이죠. 나한테만 가치 있고 훌륭한 게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공명하는 것이 되고, 나아가 업계와 애호가에게도 인정받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 건 또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많이 그리는 것, 잘 그리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SNS에 그림을 올리거나 전시를 하거나 작품을 팔거나 하면서 사람들 안에 어떤 심상을 만들어 내고 어떤 마음의 반응을 일으키는 그 시점에, 뭔가가 달라집니다. 혼자 실험하면서 대상 없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라 누가 보고 있고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게 책임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창작자는 자신의 진정한 구심점, 삶을 관통하는 목적의식, 그리고 세상에 남을만한 가치 같은 걸 원합니다. 그런 게 없으면 그냥 팔기 위한 그림을 그린다는 느낌이나, 자신이 그냥 관성에 의존해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 어느 시점에는 내 작업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이지?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는 어디로 가야 하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속해 나가야 하지?  










이런 시점에 창작자는, 자신을 좀 더 면밀하고 냉정하게 측정해 보게 됩니다. 인터뷰를 하거나 비평을 받으면서 그런 기회가 생기기도 하죠. 그때 창작자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것들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며 거기에 포함된 여러 가지 맥락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 맥락이란 예를 들어…




내 경험, 인생사 안에서 맥락 (어떤 경험이 이 작업을 하게 했는가?)

개인의 독특함 (나는 어떤 독특한 사람인가?)

작업이 담고 있는 이야기 (이 작업은 어떤 특수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재료, 표현 방법, 기술의 맥락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가, 어떤 화풍을 채택했는가, 이 테크닉을 나는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트렌드와 시장의 맥락 (어디에 공개되었는가, 그 당시 어떤 시장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주목했는가?)

창작 판 안에서 현재의 담론 (그 시기 중요한 화두는 무엇인가? 거기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

장르 안에서 갖는 맥락 (내가 속한 장르 안에서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

사회 안에서 갖는 맥락 (내가 경험한 환경이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는가? 이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인가?)

시간성, 시대성 안에서 맥락 (작업에 어떤 시대적인 특수성이 있는가? 이 시기라서 가능한 이야기가 있는가?)

공간성 안에서의 맥락 (나는 어떤 특정한 공간의 경험을 드러내는가?)

인식과 관계된 맥락 (인식의 어떤 부분을 드러내고 있는가?)

보편성 안에서의 맥락 (이를 통해 인간 보편성에 대해서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창작자는 자신과 그 작업을 한층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더 확고해지기도 하고, 작업을 수식할 수 있는 새로운 말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도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이 미처 몰랐던 숨겨진 동기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작업의 메시지가 어디에 가닿을 수 있는지 가늠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창작자는 더 깊이 있는 작업을 위해 자신의 맥락과 관련된 부분을 키우게 됩니다. 자신의 창작을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 책을 읽고 역사와 원리를 알아가고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간에 대해 공부해야 하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작업에 대한 통찰력이 생깁니다. 창작자는 필요한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에 뛰어들고 거기 흠뻑 빠져들어야 합니다. 생의 희로애락을 겪고 실패와 성공을 겪고 여기서 무엇을 얻었는지 회상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작업에서 세운 가설을 스스로 검증하고 이에 대해 말할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삶은 결코 창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창작자는 다른 창작자와 교류하고 여러 작품을 접하고 시장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대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습니다. 창작자는 자신과 자신 아닌 것을 분별하고 자신이 아닌 것을 제거해 나가며 점점 더 고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작업에 설득력을 가져옵니다.

  


창작자는 여러 가지를 가로질러 계속 왔다 갔다 하며 자신의 작업과 관계를 맺습니다. 작업-공부-경험-언어화-작업-공부-경험... 이런 식으로 마치 물이 흐르듯 여기서 저기로 중심을 옮겨갑니다. 창작자는 이 모든 것을 다시 창작으로 끌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작업은 어떤 방향으로든 달라지게 됩니다. 창작자를 수식하는 여러 가지 맥락은 이런 과정에서 점점 인과관계가 쌓이고 그 사이가 점점 촘촘하게 연결됩니다. 그리고 작업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가 됩니다. 창작자는 이런 방식으로 점점 깊어집니다.



의미는 이런 과정 어딘가에서 만들어집니다. 의미는 작품 하나에서, 행위 하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잇는 선에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죠.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의미 그 자체에 얽매여 있습니다. 20대 때, 내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힘을 잔뜩 줬던 때가 기억납니다. 각종 사회적 메시지가 난무하는 가운데 내 것도 의미가 있어야 할 것 같았죠. 그럴 만한 단계가 절대 아니었는데, 그림으로 언어로 더욱 심오하게 포장했습니다. 크리틱을 하거나 설명을 하기 위해 그림의 실제 깊이를 넘어서는 장황함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육받을 때를 회상해 보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은 채 과도한 의미를 요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기억 속에는 겉만 화려하고 ‘나는 다 안다!’라고 떠들고 있는데 속에는 혼란이 가득한 작업들로 가득합니다. 그런 건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미숙하고 뭔가를 더 알고 싶어요 ‘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그게 더 의미 있었을 것입니다.








의미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기에 아직 시작하는 지점인데 과도하게 의미를 보여주려 하거나 장황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과정 속에 있음을 수용하세요. 남들에게 보이는 의미 그 자체를 중요시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평생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현재의 일을 하세요. 그러나 순간순간에 깨어있으세요. 매 순간에 진솔하게 다가가세요. 그런 하루하루를 모으세요.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 걸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보여주세요. 멈춰야 할 땐 멈추세요. 가야 할 때 나아가세요.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더 끌어오기 위해 좀 더 큰 그림 속에서 멀리 가보세요. 돌아올 곳이 어딘지 기억하고, 자신이 언제나 해오던 것의 좁은 관성에서 벗어나세요. 자신의 필요를 외면하지 마세요. 의미는 그 가운데 생길 것입니다.








이전 12화 창작으로 돈을 버는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