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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식 Oct 21. 2023

실패의 가치(1)

영국에서 배운 것

처음에 썼듯이, 저는 2012년 영국에서 디자인을 배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교육 자체에 엄청나게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생활하는 것에 더 설렘이 있었죠. 그런데 그때 배운 것은 아직까지도 제 작업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충격을 가져다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사람들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저를 면접 봤던 교수는 제게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basic'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석사 과정이니만큼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뭔가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진짜 '기본'이었습니다.



첫 과제로 주어졌던 것이 '원circle'이라는 주제였습니다. 그걸로 아무거나 해오라더군요. 유치원생 수준의 주제에 처음엔 ‘이게 뭐지…?’라며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다음번 면담에 멋진 그래픽 작업과 원의 개념에 대해 수집한 각종 자료를 의기양양하게 가져갔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런데 교수는 이게 아니라며 절 되돌려 보냈습니다. 두 번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라는 피드백을 받고 한 달을 날리고, 자존심이 팍 꺾이고 나서야 뭔가 진짜 ‘이게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생전 해본 적 없던 활동을 했습니다. 주변의 원형을 관찰하고, 그 배치를 수집하고, 보일 때마다 사진을 찍었습니다. 접시, 표지판, 맨홀… 이런 것들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집하고 다녔죠. 이게 뭐가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면서요.



그런데 수집한 것들이 많이 쌓이다 보니까, 원이 원래 뭐였다는 의미가 점차 사라졌습니다. 대신 구조와 배치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건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에 제시되어 있던 맥락, 정의, 개념 대신 ‘어, 나 여기 관심 있네…?’라고 백지상태에서 떠오르는 흥밋거리를 발견하는 경험이었죠. 그건 정말 유치원생이었을 때나 느껴봤던 놀이 감각이었습니다. ‘이런 사소한 관심을 믿어도 된다고…?’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교수는 그제야 오케이 사인을 주며 계속 진행해 보라고 했습니다.



흥밋거리가 생기자 다음에 할 일은 그 관심사를 최대한 단순한 방법으로 실험해 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를 잘라 여기저기에 옮겨보며, 그것도 또 사진을 200장 찍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다 해보고 거기서 어떤 흥밋거리가 생기면, 그걸 또 200번 해보는 거였죠. 이런 걸 세상 중요한 일을 하듯 진지하게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나 나름대로 한국에선 감독님 소리 듣던 사람인데...




중요한 건 매번의 과정이, 그냥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난 이런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야지.’가 아니라, ‘이번엔 원을 겹쳐 최대한 많은 조합을 만들어봐야지.’ ‘이번엔 이 현상에 관련된 책을 있는 대로 찾아봐야지.’와 같이, 계획을 당장의 관심사에만 국한해야 했습니다. 각 과정에서 경우의 수를 최대한 수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전 과정이 다음 과정으로 이어지는 합리적인 이유를 늘 설명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절대 이미 존재하는 개념에 의지해 결론을 빨리 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약이 있다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건 결과 지향적인 한국인에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중·일 사람들이 대체로 다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의구심의 시간이 지나가고, 실험의 한복판에 들어서자 완벽한 결과를 쥐어짜 내야 하는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흥밋거리에만 집중하자 여유와 즐거움이 찾아왔습니다. 각 과정의 무엇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경우의 수를 충분히 수집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패와 성공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 결과물은 정말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과정은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이란 디자인 방법론의 입문 과정이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열려있는 사고를 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따라 해 보고 나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무시해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한국에서는 질문 그 자체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결과물 레퍼런스를 수집하는 것부터 일을 시작했었죠. 미리 ‘이런 걸 만들자’고 결론을 냈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만 뭔가를 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숙고와 시행착오에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다른 길로 새거나 방향을 틀면 시간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오직 결과, 외양만 생각했습니다. 그 외양에 맞춰서 그럴듯한 말을 붙였죠. 한국에서는 언제나 그것이 통했고, 내가 아는 한 평가하는 사람들도 그걸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찾은 레퍼런스나 개념은 이미 그때에 유효기간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기존 개념이나 사례는, 참고하는 용도로서 살펴보는 것이지, 의존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의존하게 되면, 언제나 이를 뒤따르게 되는 일만 일어났죠. 그러지 않으려면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는 것을 잊고 나의 질문 자체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접근해야 했습니다. 제로 베이스에서 스스로 보고 느끼고, 시행착오해야 했습니다. 영국이 개념 설계와 원리에 강한 나라였던 건, 시행착오와 축적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여기는 이런 교육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물론 해외의 것이 옳고, 한국의 것이 나쁘다고 단순히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국은 개념을 받아와서, 그것을 꽃피울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죠. 한국은 fast-follower로서 이에 적합한 방식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결과주의, 단기 성과주의, 선택과 집중, 실행역량과 같은 것들 말이죠. 우리는 여기에 적합한 교육 방식을 채택해 왔고요. 사실 영국은 대단히 원리와 과정에 충실한 나라지만 한국만큼 빠르고 화려하고 세련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심플하고 투박한 편입니다. 그냥 그 두 가지는 역할이 정 반대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결국 내게 없는 것은 배워야 하기 마련입니다. 영국에서 받았던 이 엄청나게 단순했던 훈련은, 제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유용한 감각을 깨웠습니다. 그건 바로 '실패를 받아들이는 감각'이었습니다. 그건 아직까지도 제 작업에 기본 베이스가 되고 있습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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