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장치를 마련하라
창작자는 흔히 이상을 좇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은행가들은 모이면 예술 이야기를 하고, 예술가들은 돈 이야기를 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그건 좀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창작자는 내가 이걸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끊임없이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세를 따르거나, 먹고살 만한 일을 선택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제가 근 15년 가까이 봐온 것은 이 밸런스 게임에 지쳐서 수척해져 있는 창작자들이었습니다. 너무 가난하거나, 꿈을 버리고 온 것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하거나, 혹은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거나.
여기에 대해서 저는 생계가 일단은 중요하다고 말하는 편입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저는 이런 생계와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창작자가 있다면, "꿈에 올인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사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던지 해서 먼저 최소한의 필요를 채우라고 합니다.
대신에 저는 하루에 딱 30분만 투자해서 자기 작업을 하라고 합니다. 30분만 하는 대신 그 작업은 한치의 타협도 없는 온전한 자신의 것을 하라고요. 누구의 눈치를 보지도, 대세에 연연하지도 않는 그런 것 말이죠. 정말로 순도 100프로의 자신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창작에 생계까지 걸려 있을 땐 대세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생각이 많아지면서 이도저도 아닌 게 나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애매모호한 태도엔 애매모호한 결과가 따릅니다. 뭔가 할 때는 미친 짓처럼 해야 합니다. 망할 걸 각오하고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삶의 무게가 실려있으면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생계가 걸려있지 않으면 망해도 괜찮습니다. 진실하게 하면 망해도 재밌었으니까 본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망해야 '아, 이건 아니구나.'라면서 깨끗하게 미련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창작에는 그렇게 실패하고 점점 좁혀가는 시행착오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내 생계가 걸려있는데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포인트는 생계 자체가 아니라, 창작은 진실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생계의 문제를 해소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고 '이건 죽어도 성공해야 해...'라고 하고 있으면 경직되기 쉽습니다. '해보고 안되면 또 하지 뭐.'라는 유연한 마음에서 진실한 게 나오고 진실한 것에서 창조적인 게 나옵니다.
물론 이 글은 지원이 충분하거나 올인할 만큼 확신 있고 용기 있는 창작자를 위한 글은 아닙니다. 좀 더 점진적으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가기를 위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봐왔던 수척해진 얼굴들을 생각하며 쓰는 글입니다. 처음부터 100프로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결국 시작조차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거긴 완벽하지 못할 거란, 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 방법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안전하게, 그라데이션으로 가세요. 조금씩 리스크가 없을 만큼 가세요. 대신에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실한 것을 하세요. 그걸 쌓고, 사람들에게 내보이다 보면 어느새 볼륨이 생기고 그게 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경력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아직도 이런 방법을 통해서 밸런스를 맞춥니다. 현실을 살되, 몇 시간만 투자해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의 일을 합니다. 그 작은 것에 삶의 방향을 이동시키는 힘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하는 게 익숙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하고 한두 시간 앉아서 만화를 그려 첫 독립 출판물을 만들었고, 그 경력으로 만화 연재를 하면서 틈틈이 개인 일러스트 작업을 했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서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이런 글을 쓰는 데에는, 여기에 또 제가 가고 싶은 방향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폭발적으로 성공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제게 크게 리스크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글을 쓴다는 이 행위 자체는 제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어느새 사람들은 제게 '글 잘 보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글 쓰는 것이 저 스스로의 정체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꿈이냐 현실이냐 하는 양자택일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를 지키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가는 게 저는 참 좋습니다. 이런 방법이 생계와 꿈 사이에서 서성이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