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앞서 말한 영국에서 1년 반 정도의 훈련을 통해 습득한 태도와 습관이 있습니다.
그건 창작의 결과물에 최선을 다하되, 여기에 내 성공과 실패가 달렸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내 작업을 내가 인정받기 위한 수단,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방에 성공하기 위한 원대한 것을 기획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죠. 그런데 이 훈련 이후에는 창작이란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창작이란 그저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이라고요.
시행착오를 하다 보면 변화가 자연스럽습니다. 이전 작업을 뛰어넘기 위해 시도해 보는 것들이 있고, 내 신변의 변화, 생각의 변화가 가져오는 것들이 덧붙여집니다. 하나의 작업이 다음 작업을 이끌고 오며 연쇄작용을 합니다. 여기에는 고저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좀 더 맞고, 어떤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맞지 않는 것을 경험해 봐야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온 힘을 줘서 몇 년간 한 만화 작업을 통해, 그제서야 이 방식이 100% 저에게 맞는 방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걸 끝내 보지 않으면, 유통까지 해보고 할 수 있는 것까지 다 해보지 않으면, 그리고 그 결과가 주는 느낌을 맛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느낌을 통해 저는 미련 없이 다른 것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걸 해봐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영영 미련을 가졌을 테니까요. 이제 저는 그런 건 돌아보지 않고 제가 더 하고 싶은 것만을 합니다. 점점 좁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제대로 안되네.'라는 느낌이 주는 방향 전환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하나를 맛보는 과정입니다.
창작은 일종의 수행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처한 특수한 현실을 나의 필터를 거쳐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통해 사람들과 공명하고, 또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여정을 통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창작은 성공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수행으로서의 창작에서는 성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여나 창작을 통해서 성공한다면, 그건 성공이 따라오는 것이지 내가 성공을 목적으로 창작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창작자 본인이 알 것입니다.
단기적인 성공을 추구할 때는, 실패했다고 느끼면 큰 타격이 됩니다. 실패라 여겨지는 걸 경험한 후 자신감을 상실하고 아주 떠나버리는 창작자들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창작자의 삶을 하나의 큰 프로젝트라고 여긴다면 실패는 타격이 되지 않습니다. 잘 안되었을 때 한동안 속상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게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나름 수확이 있는 것이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안된다는 것에서 난 무엇을 배웠나?’ ‘다음엔 뭘 해보면 될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과정을 가볍게 합니다. 가벼우면 덜 휘둘립니다. 이런 것들이 쌓이면 훗날 여기서 뭘 배웠는지 얘기할 수 있고 그게 자신의 작업을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토대가 될 수있습니다. 이렇게 배운 것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작업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아래에 시행착오와 촘촘한 선택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유명해진 창작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을 여기서 지켜보다 보니 그건 계속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몇 년간 메이저라 여겨지는 판이 휙휙 변하면서 계속 창작자가 물갈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판’은 새롭고 젊은 창작자를 계속 유입해야 유지됩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전에 활동하던 창작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걸 실패라고 여기면서 떠나야 할까요?
세상이 변화하면 누구나 잠시동안 실패자가 됩니다. 실패는 언제나 눈 앞에 있습니다. 그냥 그게 일상입니다. 요즘 한번이라도 실패하면 나락갈 것 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있는데 어쩔 수가 없습니다. 거기엔 성장도 성숙도 없습니다. 앞서 쓴 다른 글들은 ‘좀 더 성공적인 창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걸 안다는 게 늘 성공가도 위에 있을 거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좀 더 의미 있는 실패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실패는 계속 찾아올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그냥 이 변화와 고저는 당연한 것이며 언제나 내 창작이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를 대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제게는 이 일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요인인 것 같습니다. 이 노하우가 우리가 창작을 계속 사랑하는데, 창작을 좀 더 즐겁게 지속하는데 힘이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