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남자애에게 고백하러 가는 중학생 딸을 응원해 주고, 섹시한 옷을 사준 다음 클럽까지 데려다주고, 적어도 일이 주에 한 번씩은 이태원이나 연남동 핫플레이스에서 같이 밥을 먹는 아부지는 나의 자부심이었다. 우리만큼 특별한 부녀 사이는 없을 거라는 생각.
잠실에서 김포공항 행 리무진버스가 떠날 때까지 밖에서 지켜보는 아부지의 모습을 보고 같이 탑승한 후배가 말했다. "와, 저희 아빠는 제가 차에서 내리면 그냥 가버리는데... 선배님 아버님께선 아예 주차까지 하고 기다리시는 거예요?" 아나항공은 대학 졸업 후 얻은 첫 직장이었고, 세계 10대 항공사에 출근하러 가는 길은 스물세 살인 내게도 아부지에게도 설레는 일이었다. 아부지는 캐리어를 끌고 떠나는 내 모습을 늘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다. 후배는 아부지 닉네임을 '은빈바라기'라고 지어주었는데 나는 그것이 못내 뿌듯했다.
나한텐 이렇게 다정다감한 아부지가 있어.
그 생각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주었다.
지난 주말엔 아부지와 한남동 데이트를 했다. 파스타와 오므라이스로 인기 있는 레스토랑에 대기 번호를 걸어놓고 편집숍을 구경했다. 뒤늦게 들어간 레스토랑은 하얀 커튼과 분홍색 소파로 사진 찍기에 좋았다. 우리는 밥을 먹고 와플 맛집의 카페도 갔다. 그곳에서 나는 글감을 짜내기 위해 아부지를 재촉했다.
"아빠, 우리만의 스토리 있잖아. 뭐 또 없을까?"
아부지는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니 생각나지 않는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에 굴하지 않을 나는 생각 좀 해보라고 닦달했다.
"중학생 때 학원비 까먹은 거는 어때? 아빠 내가 학원비 까먹은 거 알고도 화내지 않았잖아. 그래서 더 미안하고 기가 죽었던 스토리? 수능 끝나고는 우리 가족 다 같이 돼지갈비 먹었지? 음, 결혼식에 아빠가 축사 준비하고 신부 입장 연습하던 장면을 써볼까..."
아부지는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마시더니 입을 뗐다. 그래도 은빈이가 잘 기억해주어서 다행이라고.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아부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함께 하는 시간에도 일 생각에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던 것 같다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런 변명은 안 해도 된다며 웃어넘겼지만, 나의 기억과 아부지의 기억이 어긋난다는 점에서 반감이 들었다. 각자에게 기억은 다르게 남을 수밖에 없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는 반감이.
한평생 우리 부녀가 지지고 볶는 모습은 내게 참 따뜻한 장면으로 추억된다. 그런데 그 애틋한 장면들이 아부지에겐 아닐 수도 있다니.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추억한 건지.
아부지가 다시 커피에 입을 가져다 대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주말인데도 업무 연락이 오는지 눈썹을 찡그리며 문자 메시지를 유심히 보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부지가 그렇게 말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족들과 막 저녁식사하려는데 걸려온 전화를 받다가 끝내 라면사리가 불어 터진 채 둥둥 떠다니는 부대찌개를 뒤적이며 먹어야 했던 아부지. 딸과 서점 데이트를 하면서도 구석에서 업무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느라 정작 마음 놓고 책을 살피지 못했던 아부지. 클럽에 흔쾌히 가라고는 했다만 혹시 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했을 아부지. 딸이 출근하는 뒷모습을 보다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 심정에 더 열심히 돈 벌어야겠다고 다짐했을 아부지. 딸과 핫플레이스에서 먹고 마시면서도 다 늙은 아비랑 놀아준다고 바쁜 딸 더 고생시키는 건 아닌지 눈치 보는 아부지. 그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한 번에 재편집되었다.
내가 마냥 한가롭던 시간 속에서 아부지는 그때도 부단히 바빴구나.
그간 글에서 아부지를 꽤나 자상하고 다감한 모습으로 그렸는데, 정작 아부지의 처지는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만든 글 속에 담긴 아부지의 모습에 만족하며 아부지도 이만하면 훌륭한 아빠 역할로 우리 삶에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고 내 글을 읽는 아부지 역시 뿌듯해할 거라 믿었는데, 아부지의 좋은 면만을 바라보고 부각시키려 고집하던 그 마음이 오히려 아부지를 혼자 있게 했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아부지와 나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빵집에 들러 빵도 샀다. 한 봉지씩 나눠 들고 걷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젊은 커플이 많이 보였다. 또래 친구들도 인기 있는 식당 앞에 삼삼오오 모여 웨이팅을 하고 있었다. 이전 같으면 복작대는 한남동 거리를 아부지와 놀러 왔다는 자부심에 들떴을 텐데, 지금은 아부지가 토요일 저녁 딸의 시간을 빼앗았다는 생각에 내심 풀 죽어 있지는 않을지 조바심이 들었다. "아부지, 내일 아침으로 빵 먹어?" 빵 봉지를 흔들며 무거워지는 마음을 떨쳐냈다. 아부지는 강하고 자상하고 좋은 아빠니까,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으니까. 고작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아부지가 감당하기를 바랐다.
그날 아부지가 고른 빵은 피자빵이었어요. 맨날 단팥빵만 드시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