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투명했었다는 사실

부모님의 로맨스

by 우자까

우리 가족이 외식하러 나갈 때마다 챙겨야 하는 필수품이 있다. 바로 텀블러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주로 가득 찬 텀블러다. 더 자세히 짚고 넘어가자면 술 없이 저녁을 먹지 못하는 엄마를 위한 소주 텀블러다.

엄마는 소주 없이 먹는 밥을 느끼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식당에서 소주를 한 병 시키면 될 텐데 굳이 소주 텀블러를 챙기는 이유는? 술 마시기에 민망할 만큼 차분한 분위기의 식당에 가거나 가끔 소주가 없는 식당도 있어서다. 이태리 레스토랑에선 와인을 팔지 소주를 팔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주 가는 즉석떡볶이집에도 소주가 없다. 엄마는 그럴 때면 가만히 앉아 소중한 소주 텀블러를 꺼내 다소곳하게 마신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물처럼 보이리라.

한 번은 엄마랑 동네 메밀국수 집에 갔는데 마침 그 가게에도 소주가 없었다. 엄마는 당황하고 말았다. 텀블러를 챙겨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에게 오늘은 그만 포기하라고 시큰둥하게 말한 뒤 고개를 숙이고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간 안절부절하던 엄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 쪽을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왜. 뭐."

"웅비. 아까 보니까 요 앞에... 편의점이 하나 있던데."

나는 설마 했다.

"근데."

"가서 물 한 병이랑 소주 한 병 사서..."

"설마 페트병 물 다 따라버리고 소주로 채워서 오라는 소린 아니지?"

"왜 아니야~ 맞지잉! 얼른 국수 나오기 전에 다녀와."


나는 이 아줌마가 진정 알코올 중독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것도 잠시, 엄마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 하는 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의점에서 생수와 소주 한 병을 사서 나온 나는 편의점 앞 화단에 생수를 쏟아버린 다음 페트병 입구에 소주를 졸졸졸 부어 넣었다.


"야, 야! 저 여자 좀 봐."


지나가던 남정네 무리가 나를 향해 수군거렸다. 그날 나는 화려한 꽃무늬가 가득 수놓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길거리에서 물병에 소주를 정성스레 따르고 있는 여자의 모습...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해서 술을 마셔야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술을 잘도 마시는데 반해 아부지는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마구 뛰는 체질이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마시지도 않는다. 나는 아부지를 똑 닮았고, 오빠는 엄마 체질을 물려받아 애주가로 소맥을 매일 같이 즐기다 통풍까지 왔다. 통풍에 가장 안 좋은 음식이 맥주라고 요즘엔 소주만 마셔댄다.

술을 잘 못하는 나는 데이트할 때도 맥주 한두 잔만을 즐겨 할 뿐, 남자친구와 술을 진탕 마셔본 적이 없다. 그런 나를 보며 오빠는 모름지기 사람은 술을 마셔야 더욱 진솔한 대화가 오갈 수 있다면서 남자들이 너 같은 애랑 무슨 재미로 만나겠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술 없이도 솔직한 대화를 끌어내는 능력의 여자란 것을 너란 놈은 모를뿐더러 그런 여자를 만나보지도 못한 게 분명하다고 반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엄마와 아부지의 연애 시절 데이트가 궁금했다. 엄마는 반주를 꼭 해야 하는 사람이고, 아부지는 되도록이면 술자리를 피하는 사람인데 둘은 어떤 데이트를 했을까. 그날도 엄마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귀가가 늦어졌다. 아부지와 둘이서 저녁을 차려 먹다가 대뜸 물었다.


"아빠는 엄마랑 만나면 맨날 술 마셨어?"

"그럼, 거의 매일 먹었지."

"안 힘들었어?"

"요령껏 마셨지, 요령껏."


상사와 함께 하는 술자리도 아니고 연인과 가지는 술자리에서 요령껏 마시는 술이라니. 나는 애꿎은 우리 아부지를 힘들게 만든 엄마에게 은근히 심술이 돋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친척 모임에서 엄마와 술잔을 기울이던 큰아빠가 해준 이야기는 더 가관이었다.


"니네 아빠가 맨날 어떤 놈들이랑 술 처먹고 곤죽이 되어서 집에 오나 했더니만~ 그게 다 엄마 때문이었어, 니네 엄마."

엄마는 큰아빠의 술잔을 얌전하게 받으며 말을 이었다.

"아주버님도 참...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술도 못 마시는 놈이 집에 와서 토하고 뻗어버리고 했습니다요~? 한 번은 머리가 너무 아픈지 차마 눕지도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서서 자더라니까요?"

"호호호, 아주버님~ 알았으니 한 잔 더 받으시지요."


옆에서 그 소리를 듣던 나는 저 저 저 알코올 중독자 때문에 힘들었을 과거의 아부지가 너무 가엾게 느껴졌다. 자그마치 그들은 6년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그럼 장장 6년간 우리 아부지는 숙취로 갖은 고생을 했다는 말 아닌가. 그렇게 해서 지켜낸 사랑의 결실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큰집에서 집으로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이미 대취해 뒷좌석에 누워 코를 골았다. 엄마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거나하게 풍겨왔다. 나는 뭔가 다 불만인 기분이 들었다. 불만인 심정을 담아 아부지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아빠는 엄마가 뭐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니고 결혼까지 한 거야?"

"은빈이, 엄마가 오늘도 술 마셔서 짜증 나는구나."

"내 참!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아부지는 운전하느라 앞을 내다보며 말했다.

"연애하던 시절에 한 번은 엄마랑 너무 늦게까지 술을 마신 거야. 그래도 시간이 늦었으니 엄마를 집까지 데려다줬지. 그러고 나서 집에 가려니 버스도 끊기고 통금 시간이 다 된 거야. 그때만 해도 통금이 있었을 때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걷고 있는데 논밭 근처에 볏짚을 한가득 쌓아놨더라고. 겨울이어서 외투 지퍼를 목까지 잠그고 볏짚 사이로 들어갔지. 몸을 웅크리고 누워보니 나름 안락했어."


나는 고개를 돌려 뜨악하는 표정으로 아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그래서. 거기서 잤어?"

"응, 아빠도 술 취했으니 잠이 솔솔 오더라고. 언제 잠들었던지 아침에 개가 킁킁거리면서 아빠 얼굴 냄새 맡는 소리에 깼어."

"와~ 미쳤네, 미쳤어. 누가 볏짚 태운다고 불이라도 붙였으면 어떡하려고?"

"아빠도 혹여 누가 볼까 싶어 벌떡 일어나서 몸에 붙은 볏짚들 털어내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 거기가 영남대 근처였어. 이제 아침이니까 등교 시간이었는데, 아빠는 영남대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니까 텅텅 빈 버스였어. 맞은편에서 오는 버스에는 영남대에 등교하는 학생들로 가득 찼더라고. 그때는 아빠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

"뭐하긴. 여자에 정신 나가가지고는. 이래서 아들놈 다~ 키워도 소용없다더니. 하이고, 우리 할무니는 이 사실을 알랑가 몰라."

아부지는 볼멘소리를 하는 딸이 마냥 귀여운지 한 번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엄마랑 만나면서 수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 기억은 유난히 또렷해. 볏짚 더미 속에서 바라본 하늘이, 참 아름답고 광활했어. 공기는 차가웠지만, 또 굉장히 맑아서 자려는데 개운한 기분까지 들었다니까."

"개뿔. 아빠는 그날 얼어 죽을 수도 있었어."


엄마는 깊이 잠들었는지 본격적으로 이까지 갈면서 코를 골아댔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하늘에는 별이 한 개도 없었다. 미세먼지로 탁한 나날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집에 들여보내고 볏짚 더미 속에서 새우잠을 청했던 한 사내의 겨울밤을 그려보았다.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고 일상과 생활을 이어나가는 와중에 집 밖으로 뛰쳐나가 볏짚 더미에서 자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고 생각했을 날이 그에게 과연 없었을까. 분명 있었을 테다. 여러 번, 꽤 많이. 어쩌면 굉장히 잦은 빈도로.


그럴 때마다 그는 대신 베란다로 나가 이제는 탁해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날 그가 볏짚 더미에 누워 바라본 맑고 개운했던 하늘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광활했던 그 날의 밤하늘이 지금 우리 가족의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내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릿해져 괜히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나도 아빠 같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

아빠는 눈가의 주름을 깊게 만들며 흐뭇하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

"아빠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야지. 아빠는 돈도 많이 못 벌고."

"맨날 그 소리."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돈은 많이 못 벌더라도 나를 위해 볏짚에서 기꺼이 잘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결혼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내가 여지까지 결혼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 하긴 지금은 야간통행 금지도 없고 내가 사는 도시에는 볏짚도 없으니 그럴만한 일도, 남자도 없겠다. 확실한 건 내가 비록 그런 사랑을 못 해봤더라도 내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투명했었다는 사실은, 나를 분명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차 안에는 엄마가 이를 가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렸고, 나는 좌석 깊숙이 몸을 누이며 하여간 팔자 좋은 아줌마라고 생각하고는 눈을 감았다. 아부지의 운전은 부드럽고, 조용하기만 했다.


이후 뚱목이와 결혼을 한 저는 조수석에만 앉으면 잠이 쏟아져 뚱목이가 운전을 할 때 안대에 귀마개까지 하고 잠을 잡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팔자 좋은 아줌마입니다.
KakaoTalk_20221023_17020350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