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위한 서툰 선물

기억에 남는 면세품 판매

by 우자까

보통 사람들은 비행기를 탈 때 저마다 기대하는 것이 있다. 기내식이나 기내 영화 프로그램, 처음 타보는 기종에 대한 호기심, 창문 아래로 펼쳐지는 구름과 함께 펼쳐지는 아득한 풍경 같은 것들 말이다.


그 가운데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있는데, 바로 기내 면세다. 출국 수속 시간에 쫓겨 미처 공항 면세점을 만끽하지 못한 승객들은 기내 면세품으로나마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항공사에서도 수익 창출을 위해 기내 면세품 판매 직전에 방송을 한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의 선물은 준비하셨습니까~? 저희 항공사에서는~' 그간 기내에서 수많은 면세품을 판매한 나는 면세품 판매 과정에 큰 감흥을 갖지 않았다.


그날 비행은 하네다 출발-김포 도착 비행이었다. 한일 노선은 비행시간이 약 두 시간으로 짧아 굉장히 바쁘다. 이착륙 시간을 뺀 서비스 가용 시간은 한 시간 반도 안 된다. 우리는 시간 안에 기내식 서비스와 기내 면세품 판매까지 마치기 위해 걷고 또 걷는다(가끔 달리듯이 걷기도 한다).


겨우 기내식 서비스까지 마치고 면세품 판매를 준비하러 가기 위해 통로를 빠르게 걷고 있는데, 수더분한 인상의 중년 남성 승객이 손을 들어 보이며 불러 세웠다. 승객은 쭈뼛쭈뼛하며 기내 면세품 책자를 열어 한 페이지를 집게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이거 말이여. 여자들 얼굴에 처바르는 거 맞지? 아가씨, 이거 하나 줘요.”


내게는 비행하면서 생긴 습관으로 승객의 요구 사항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승객이 했던 말을 반사적으로 복창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또 반사적으로 복창하며 말을 이었다.


“네. 여자들 얼굴에 처바르는 거 맞습니다(잉?). 아! 여자들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맞습니다... 하나 준비해 드릴까요?”

“허허. 그래 그래. 그 분칠 처대는 거. 하나 줘요.”


제품은 승객의 걸걸한 단어 선택에 어울리지 않는 랑콤 화장품 종합 팔레트였다. 아내 선물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여전히 걸걸한 말투로 비행기에서 주웠다며 건넬 것만 같은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다른 때보다 더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서 다시 승객 앞으로 갔다. 그는 아직까지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면세품으로 랑콤 팔레트 세트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승객은 계속 책자를 보면서 물었다.

“어어.. 근데 아가씨... 이거 뭐 이렇게 조잡시러워? 뭔 색깔이 이리 알록달록해요?”

나는 사진 속 팔레트 칸마다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쪽 칸은 입에 바르는 립스틱이고요. 이쪽은 눈에 바르는 아이 섀도우고, 이쪽 칸은 볼터치…”

승객은 내가 말한 화장품이 어디에 바르는 건지 그의 언어로 다시 확인했다.

“어어.. 요거는 주둥이. 요건 눈에. 요거는... 볼 뭐? 볼때기??"

“아, 헷갈리시죠. 다양한 화장품이 하나로 담긴 종합 팔레트라서…. 그런데 아마 사모님이 보시면 잘 아실 거예요.”

“우리 와이프 잘 몰러. 허구한 날 장사만 하느라꼬. 평생 화장 한 번 잘 안 하던데. 그러다 할망구 다 됐잖아.”


나는 그의 아내가 화장품을 받아보면 잘 알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먼저 승객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수더분하고 순박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어쩐지 이런 화장품을 사는 게 부끄럽고 어색하게만 보이는 중년의 남자. 어쩐 일로 혼자 일본에 왔다 가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것까지 얘기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럼 잠시만요,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갤리로 돌아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메모지에 화장품 팔레트의 단면과 똑같이 그림을 그리고, 네모나게 구분된 칸마다 글씨를 써 작게 채워 넣었다.


-아이섀도우(눈꺼풀)

-볼 터치, 블러셔(볼 발그스레하게)

-립스틱

-잡티 가려주는 컨실러(기미, 주근깨 가리기)

-하이라이터(바르는 부위를 환하게 밝혀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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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메모지를 들고는 종종 재바른 걸음으로 다시 그 승객에게 돌아갔다. 나는 메모지와 화장품 팔레트 사진을 번갈아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손님, 이건 볼에 발라주는 건데요. 볼을 발그스레하게 만들어 주는 거고요. 이거는 눈꺼풀을 반짝이게 해주는 거예요. 제 눈꺼풀 보시면 반짝반짝하니 예쁘죠? 이거는 컨실러라고 사모님 잡티 가리고 싶은 곳에 바르면 되는 거고, 이거는... 하이라이터니까 콧등 살려주는 걸로 쓰시면 돼요. 메모지에 뭐가 뭔지 적어놨어요.”


옆에 앉은 다른 승객 두 명이 내 얼굴과 화장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때 나는 승무원이 아닌 화장품 판매원이나 뷰티 방송 진행자처럼 보였을 것 같다. 조금 남우세스러웠지만 승객이 뭉툭하고 투박한 손끝으로 메모지의 네모 칸을 짚어가며 하나라도 놓칠세라 따라오는 모습을 보니 뭐든 어떠랴 싶었다.


승객은 아아, 그러니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하며 몇 번 내게 확인한 끝에 눈가와 입가에 이미 깊게 진 주름을 더욱 짙게 만들며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순간 그 주름들이 승객이 밟고 걸어온 지난 삶의 지도로 보였다. 나는 그 주름을 보며 승객의 지난 삶을 잠시 짚어본 것이다.


이마에 가로로 선명하게 패인 서너 개의 주름은 아마도 IMF 때 생활고로 생겨나지 않았을지. 세로로 깊게 자리한 팔자 주름은 아이들이 사춘기로 속 썩일 때 생겼을 것이고, 눈가에 아로새겨진 잔주름은 한밤에 아내의 작게 우는 잠꼬대를 숨죽여 느끼면서 생겨나지 않았을지.

기내에서 만난 승객의 지난 모습을 상상해보는 일은 비행하면서 생긴 습관 같은 버릇이었다. 내 쪼대로 펼쳐보는 상상은 그만하라는 듯 중년의 승객이 말했다.


“고마와요 아가씨. 더 늙은 아줌마, 아니 할망구 되기 전에 곱게 분칠이나 해보라고 급하게 하나 사는 건데... 아무튼 고마워요. 이거랑 아가씨가 그려준 그림이랑 고대로 같이 주면 되겄네. 고마워.”


나는 결제를 하며 아내분께서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좋은 선물이 될 거라고 말했다. 영수증을 들고 뒤돌아 면세품 판매 담당 승무원에게 건넸다. 담당 승무원은 다른 승무원들이 각자 판매해서 넘긴 모든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얼핏 봐도 열 장은 넘어 보였다. 그새 많이 팔린 모양이었다.


비즈니스맨들은 오가는 출장길에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선물을 종종 샀다. 나는 기내에서 그런 남자들을 많이 보았다. 여자친구에게 무슨 선물이 좋을지 고민하다 선뜻 고르지 못해 승무원에게 추천 상품을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고, 이미 취향을 잘 알아 과감히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는 모습과 대담하게 고르는 모습 중 어느 모습이 더 근사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 눈에는 모두 사랑이 그득한 이들로 보였을 뿐이니까.


착륙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갤리 정리를 서두르며 랑콤 팔레트를 손에 들고 있는 아저씨 승객을 생각했다. 낯부끄러워 좀처럼 사본 적 없었던 여자 화장품을 아내에게 어떻게 건넬지를. 그는 조금은 우쭐하며 아내 앞에서 멋쩍은 웃음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그 웃음으로 얼굴 가득 자리 잡은 주름이 더욱 사려 깊게 패어 보일지라도.



선물이 감동인 이유는 선물 그 자체가 아니라 나를 위해 어떤 선물을 할지 고심하는 그의 모습과 시간에 고마운 거잖아요. 꽃을 든 자신의 모습이 괜히 쪽팔린데도 그 쪽팔림을 무릅쓰고 꽃 한 송이를 사서 들고 오는 모습, 부담스러운 분위기의 액세서리 매장에서 민망하지 않은 척 목걸이를 고르는 모습, 그 색이 그 색같이 보이는 립스틱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

그러니까 뭐 어때요. 사실 나는 장미보다 프리지아를 더 좋아할지라도. 목걸이의 펜던트가 좀 촌스럽고 립스틱은 내 얼굴에 맞지 않는 색이어도. 나를 기쁘게 해주고자 한 그의 마음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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