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딸이 주고 받은 세 번째 편지
딸이 아빠에게_
나름 대학생이라고 신나가지곤 한창 술집을 드나들었어. 술은 아빠 체질을 닮아서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뻘게지고 했지만, 술집의 들뜬 분위기가 좋아서 친구들과 자주 가곤 했지.
그날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동네 친구를 만났어. 카페 마감이 10시였으니까 친구를 만나서 맥줏집에 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지. 그래도 집에서 10분 거리인 술집이라서 큰 부담이 없었어. 아르바이트비로 생맥주에 감자튀김을 시켜서 먹노라니 슬쩍 어른이 된 기분도 들었고. 그렇게 친구랑 한창 노닥거리다가 아부지한테 전화를 했어. 12시쯤이었지? 마침 배터리가 얼마 없었는데, 집 근처 술집이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고 했어.
오백 미리 생맥 한 잔을 한 시간 동안 마셨는데도 얼큰하게 취기가 돌더라. 슬슬 집으로 가려고 흰 패딩을 챙겨 입었어. 한겨울 한밤의 공기가 매섭도록 차가웠지만 스무 살의 나에겐 시원하게만 느껴졌던 것 같아. 들숨에 청량한 기운이 폐까지 들이차는 듯했지. 고작 카페에서 받는 월급으로 맥주 한 잔 사 먹었을 뿐인데 마음까지 넉넉한 기분이 들곤 했어.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걷다가 횡단보도에 섰어. 이마트 장바구니를 든 한 아주머니랑 아디다스 운동복을 상하의 세트로 입은 남자가 나와 함께 신호를 기다렸지. 순간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속으로 얼굴이 굉장히 하얀 남자라고 생각했어.
횡단보도를 건너고 셋은 모두 빌라촌으로 들어섰어. 아주머니가 제일 앞장서서 걸었고 그다음으로 내가, 내 뒤로는 아디다스 상하의 세트 남자가 있었어. 가로등 불빛으로 그 남자의 그림자가 앞쪽까지 쭉 늘어져 보여서 내 뒤에 있다는 걸 알았거든. 걷다가 아주머니가 먼저 한 빌라로 들어갔어. 그러고도 나는 별생각 없이 걷는데 갑자기 남자 그림자가 안 보이는 거야.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어. 묘한 기시감과 함께 뒤를 슬쩍 돌아봤는데, 내 바로 뒤에는 한 뼘 거리도 안 될 만큼 바짝 붙어선 아디다스, 그 새끼가 있었어. 나는 너무 놀라 몸이 굳어버렸고, 그 새끼는 아디다스 추리닝 바지를 벗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
"나 봐. 나 봐. 안 그러면 나 너 건드린다" 그 말이 아니어도 나는 꼼짝할 수 없었을 거야. 왜냐하면 그 미친놈이 아디다스 바지 주머니에서 빨간색 손잡이의 식칼을 살짝 꺼내 보였거든. 여태껏 변태 새끼들을 많이 겪어본 나도 칼을 든 진짜 개자식은 처음 봤기에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어. 뉴스에서 접한 수많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여자들이 생각났어. 아, 이랬겠구나. 이렇게 꼼짝할 수 없었겠구나. 진짜 헉, 소리도 나지 않는구나. 순간적으로 내가 입고 있는 흰 패딩이 피로 물드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고, 난 입도 뻥긋하지 못했어.
그 개자식은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나의 왼팔을 꽉 잡고, 계속 자기를 보라고 말하며 자위를 시작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보기만 하라고 말한 개자식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더 한 놈이었으면 보고 있게만 하지 않고 그 이상의 짓을 강요했겠지. 나는 개자식 앞에 그냥 가만히 서있기만 했어. 그러다 그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 내 팔을 잡은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짐을 느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반대 방향으로 있는 힘껏 내달렸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몇 번이고 발목을 접질렸지만 계속해서 달렸어.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달리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통화 버튼을 마구 눌렀지. 가장 최근 통화가 아부지였어서 아부지에게로 전화가 연결됐어. 나는 아부지가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쳤는데,
"아빠! 아빠! 나 좀 데리러 와!"라고. 아빠가 무슨 일이냐? 묻는 와중에도 "아빠!!! 나 좀 데리러 와!!!"
바로 그때, 간당간당했던 핸드폰 배터리가 아예 나갔잖아. 아직까지도 오빠랑 엄마는 아부지 수명이 그때 10년은 더 줄었을 거라고 말해. 딸이 한밤에 자기 좀 데리러 오라고 다급하게 소리친 다음 돌연 끊긴 전화. 진짜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배터리 충전을 제때 해두지 않은 나도 잘못이야. 아니지, 아니지... 내가 왜 잘못이야? 그 개새끼가 죽일놈이지.
아무튼 그렇게 삑, 소리를 내고 끊어진 핸드폰을 던져버리곤 계속 달려 큰 길가로 나갔어. 때마침 인도에는 회식을 마친 듯한 남자들이 무리 지어 걷고 있었어. 나는 속도 조절을 못해 그들에게 안기듯이 달려가 부딪혔고, 놀란 남자들이 나를 밀어냈지. 나는 그들 중 한 남자의 재킷 주머니를 더듬거리다 안주머니까지 손을 뻗쳤어. 핸드폰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전화 좀 빌려달라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면서 손과 턱이 부들부들 떨렸어. 정신 나가 보이는 여자가 자기 몸을 더듬거리자 당황한 남자가 말했지.
"아니, 이 여자가... 왜 이래요!"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저앉아 손을 덜덜 떨었고,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딱딱딱 날 만큼 온몸을 다해 떨고 있었어. 그건 자신의 몸을 찌를 수도 있는 칼을 본 사람의 두려움이었어. 그런 나를 보고 남자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물었어.
"야, 가만히 있어봐."
"무슨 일 당한 것 같아."
"저기요,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내가 여전히 말을 못 하고 떨기만 하자 한 남자가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어.
"혹시, 핸드폰 달라는 거예요?"
나는 핸드폰을 받아 아부지 번호를 꾹꾹 눌렀어. 손이 사정없이 떨렸기에 핸드폰을 놓칠 것만 같았지. 통화가 바로 연결되자 아부지가 소리치는 게 들렸어. "은빈아, 어디야!!!" 그런데도 나는 말이 안 나와서 핸드폰을 건네준 남자가 전화를 대신 받아 우리가 있는 위치를 설명했어. "아... 여기 이 여성분이...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하셔서... 아, 여기가 지금 어디냐면요" 아부지는 금세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고, 나는 아부지 품에 안겨 겨우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어. 그때 지나치게 흔들리던 아부지의 눈빛을, 나를 보자마자 맥이 빠져 주저앉듯이 안아버린, 나보다 더 떨리던 그 품이 기억나.
뒤이어 오빠가 헐떡이며 달려왔지. 오빠는 아부지가 내 전화를 받자마자 날아갔다고 말했어. 아니면 우리가 살던 집 5층에서 뛰어내렸거나. 그렇게 말한 이유는, 오빠도 바로 따라나왔지만 아부지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였어. 오빠가 말했어. 아부지가 엄청 다급한 목소리로 "은빈이가 납치된 것 같다" 말하더니 집에서 튕겨 나가듯이 뛰쳐나갔다고. 아부지는 그저 뛰었던 거야. 내가 평소 다닐만한 길을 꿰고 있었으니까 그 방향으로 냅다 뛴 거겠지. 그날, 신발을 짝짝이로 구겨 신은 아부지 발이 생각나.
그날 이후 한동안 나는 밤길을 특히 무서워하게 되었잖아. 누군가 내 바로 뒤에 있을 것만 같아 걷다가도 몇 번씩이나 홱 뒤돌아보고, 아예 손거울로 뒤를 비추어가며 걷기도 했어. 어디에서건 아부지한테 나 좀 데리러 와달라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지. 그게 아부지 속도 편할 거라고 생각했어. 나를 데리러 올 길 위의 아부지 모습이,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땐 내 걱정만으로, 내 안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거든.
운이 좋았다고, 그렇게 생각해. 운이 나빠서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니라 운이 좋았기에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친 거였다고. 더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 꼭 그때뿐만이 아니더라도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불운은 만날 수 있지. 그래서 더 두려웠고 지금도 가끔씩 두려워. 이 두려움을 어떡하면 좋을까, 아부지. 그날, 아디다스 추리닝 바지에 식칼을 넣고 내 앞에서 자위하던 남자로부터 도망치던 나와, 딸이 납치된 줄 알고 무작정 달려 나온 아부지, 그날 우리 둘이 가진 두려움은 대체 어떻게 달랠 수 있는 거야?
아빠가 딸에게_
둘 째인 네가 뱃속에 있을 때 딸인 걸 알았고, 네가 태어나면 세상이 더 아름다울 것만 같았는데, 세상천지 모든 게 다 위험하게만 보이더구나. 너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닐 땐 옆으로 바짝 지나가는 자전거에도 일순간 성질이 나고, 하굣길 남자아이들이 와르르 뛰어가는 것에도 사나워지곤 했다. 그냥 동네 거리를 산책하는 건데도 다 위험하고 무섭게만 보였다.
커가면서는 오죽했겠느냐.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는 어쩜 그렇게 갈수록 교묘해지는지. 어린아이, 특히 어린 여자아이가 더 많은, 더 악질인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걸 모르지 않기에 걱정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유독 변태 아저씨들을 많이 만난 너는 학교에서 우줌마라는 별명을 얻었다며 내게 말했다. 학교 애들이 아저씨들이 너를 좋아한다고 놀리며 아줌마의 줌마를 따와 너의 성인 '우'에 갖다 붙인 별명이었지. 너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내게 말했지만, 내 심장은 땅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학교 근처 바바리맨, 차에서 길을 물어보며 성기를 꺼내 보여주는 남자, 버스에서 너의 허벅지를 훑고 내리는 남자에게 너는 매번 놀라면서도 어느 정도 무뎌져가는 모습이었다. "지겨워, 미친놈들"이라고,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너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만난 괴한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악질인 놈을 만난 날 말이다. 네 오빠와 엄마, 나는 모두 집에 있었다. 친구와 동네 호프집이라며, 조금 늦겠다고 미리 말해주어서 12시가 넘어가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먼저 잠을 잘 수는 없어 거실에서 TV나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네게 전화가 왔다. 나 좀 데리러 오라는 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고, 전화는 바로 끊겼다.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순식간에 몸을 감쌌고, 섬뜩한 기운이 등줄기를 곧추세웠다. 눈과 귀가 막히고 쿵쿵대는 심장 박동만이 내게 남은 듯했다.
그저 내달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무작정 달렸다. 너무 떨려서 손가락과 발바닥이 저려왔다. 평소 네가 걸어 다니는 골목길로 뛰면서 네가 이 길 어딘가에, 또는 이 골목길 끝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고, 그렇지 않은 상황은 있어선 안 됐으니까. 혹여 네가 정말 납치라도 당했을 수 있단 생각이 들자 눈앞이 아찔하면서 두 발의 힘이 풀렸다.
곧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나는 그게 너임을 직감했다. 핸드폰을 빌려준 것 같은 남자가 전화를 대신 받아 위치를 말해주더구나. 바로 근처 횡단보도였다. 인도에 주저앉아 있는 너를 찾았을 때, 아무 말 못 하고 덜덜 떠는 네 모습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면서도 일단은 안도했다. 무사하다, 무사하다. 뒤따라온 네 오빠는 골목길마다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 역시 그날 이후로 한층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자식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기사를 보거나 흉악한 범죄가 망가뜨린 한 가정의 모습을 볼 때, 무엇 때문에 세상에 이런 불행이나 악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난폭한 현실 앞에서 나도 난폭하게 날을 세우며 이를 갈았다.
세월호 유가족인 부모의 인터뷰에서 잊히지 않는 한 마디가 있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햇빛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아이에게 미안해서, 자신은 햇볕을 쬘 자격도 없어서 집에서도 한낮에 커튼을 치고 어둡게 지낸다고 했다.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리겠느냐만, 그 말이 내 가슴에도 선명하게 박혔다.
같은 부모이기에 더 깊이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것도 같지만, 같은 부모라고 다른 집 자식까지 제 자식처럼 소중히 여기는 세상도 아닌 것 같다.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무릎 꿇은 장애 학생 부모들의 모습 앞에서도 꿈쩍 않던 게 비장애 학생 부모들이었다. 반성조차 않는 가해 학생의 태도를 바로 잡지 않고 피해 학생과 그 부모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기는 것도 같은 부모들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목숨 장사 그만하라며 용서받지 못할 말을 내뱉는 것도 멀쩡히 살아있는 자식을 가진, 같은 부모들이었다.
그날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두려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 나는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타인의 상황에 나를 놓아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필이면 불운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부모와 아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을 놓아보며 그들의 생각을 헤아려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그들의 사연을 알리고, 안타까워하며 비탄하는 마음을 더 크게 세상 바깥으로 내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 말마따나 운 좋게 불운을 피해 간 우리의 두려움을 달래기 이전에 앞서, 운이 좋지 않았던 다른 이들의 더 큰 두려움을 향해 맞서다 보면, 그들과 더불어 한층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두려움 앞에 떠는 사람들과 기꺼이 함께 더 두려워했으면 한다. 지난번에 네가 주고 간 책에서도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_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두려움을 마주하는 태도에서 이보다 더 닮고 싶은 말은 없을 것만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