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남자친구 이야기

아빠와 딸이 주고 받은 두 번째 편지

by 우자까

딸이 아빠에게_


아부지도 처음부터 딸의 남자친구 앞에서 인자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건 아니겠지. 아부지가 염려하는 눈빛은 초등학생 때 처음 본 것 같아. 그 당시에는 핑클이랑 SES가 인기가수였고, 나는 노트에 인기 있는 가요의 노래 가사들을 받아 적었어. 노래 가사뿐만 아니라 키우던 강아지 몽실이를 그리거나 산책 루트도 적고 그랬지. 그날 먹은 맛있었던 간식 그림도 그리고. 무턱대고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


아무튼 하루는 아부지에게 내가 그린 그림을 자랑했어. 아부지는 참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하다가 그림 옆에 쓰인 글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어. "이것도 은빈이 네가 쓴 거야?" 노트에 있는 글은 모두 내 손으로 직접 쓴 거니까 나는 보지도 않고 "응!"이라고 대답을 했지. 베껴 쓰는 글과 창작해서 쓰는 글의 성질이 엄연히 다름을 알고 있는데도 아부지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짐짓 모른 채 했는지도 모르겠어. 의기양양한 내 표정을 살핀 아부지는 다시 한번 물었어. "그러니까 이 글을 네가 썼단 말이지..?"


그 글은 SES의 '너를 사랑해' 노래 가사였어.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두근대는 내 심장을 느껴

너무나 아름다운 햇살과 내 마음속에 따뜻함을 준 너

아름다운 너의 모습 바라볼 때면 언제나 너 보며 살아가고 싶고

나 너무나 잘 아는 그런 너와 있을 때면

평생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와 같은...


초등학생 딸이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남자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아부지의 다급하면서도 초조한 눈빛이 어찌나 재밌던지. 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어. "이거 SES 노래잖아!" 아부지는 그제야 허탈하게 웃었지.


그 후 중학생이 되어 노래 가사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을 때, 아부지에게 뜨문뜨문 그 애 이야기를 했어. 그 애가 축구를 할 때 얼마나 날렵한지. 키는 반에서 몇 번째로 큰지.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는 왜 또 그렇게 귀여운지. 아부지는 잘 들어주었어. "공부나 해", "벌써부터 이성 친구 사귀고 그러는 거 아니야" 같은 말은 하지 않았어. 그저 들어주었지. 내가 좋아하는 아부지의 표정, 얇은 입술로 살짝 미소 띤 얼굴을 하고서.

나는 아부지와 그 애 이야기를 해야만 조여있던 가슴이 조금 풀어짐을 느꼈어. 우리는 밤마다 내 방에서 엄마 몰래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풀어져만 가는 내 마음을 감당하기 힘든 기분이었어.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한 번씩 헷갈렸고, 그게 화가 났거든. 친구들에겐 말하지도 못했어. 내가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자존심 상해서. 아부지는 더 좋아하는 게 자존심 상할 일은 아니라고 말해주었지만, 중2병 걸린 소녀에게 그 말은 바로 튕겨져 나갔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다른 반에 피부도 희고 예쁘장한, 얼굴 크기는 내 얼굴의 반만큼 작은 여자애가 걔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 남자 애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도통 고백을 하진 않고! 조급한 마음이 든 나는 빨리 사귀어버리고 싶으니까 내가 먼저 고백하자고 결심했어. 아부지 말마따나 나는 매력 있는 마스크에 행동거지가 퍽 귀여우니까 승산은 있다고 생각했어.


운동장에서 축구를 마치고 벤치로 뛰어온 남자애에게 오늘 저녁 7시에 올림픽공원에서 만나자고 했어. 고백해서 사귈 요량이었지. 남자애는 흔쾌하게 알겠다고 하더라? 땀을 뚝뚝 흘리며 시크하게 "알겠어"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렇게 도발적이고 섹시할 수가 없었어! 나는 매점에서 사 온 빵을 건넸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 말없이 빵을 먹었어. 내 마음속에선 승부욕이 불타올랐지. 너란 남자, 꼭 가지고 말 테다...! 아, 근데 섹시하다고 해서 놀랐어? 에이, 중2 짜리도 섹시함이 뭔지 알긴 해.


그렇게 하루 종일 두근대는 마음으로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 옷 저 옷 번갈아 입어보며 집에서 나설 채비를 하는데 아부지가 퇴근하고 들어왔어. 학원 가냐고 묻는 아부지에게 고백하러 올림픽공원에 간다고 대답했지. 아부지는 양복 재킷을 벗으려다 말고 다시 입더니 데려다주겠다고 했어. 나는 "역시 울 아빠! 짱! 짱!!!" 크게 외치며 마냥 해맑게 웃었어. 조금 떨리던 참이었는데 아부지랑 얘기하면서 공원으로 가면 긴장이 풀어질 것 같았거든.


그때 나는 난생처음 고백이란 걸 한다는 사실에 달뜬 마음이었는데, 아부지와 함께 하는 고백 작전에 더 신이 났던 것 같아. 차에서 아부지는 너무 많이 좋아한다는 티를 내지 말면서 고백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는데, 나는 너무 많이 좋아하는데 어떻게 티를 안 내냐고, 어떡해 어떡해만 연발하며 호들갑 떨었지. 결국 그 남자애에게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사겨도 좋아"라고 던지듯 말했어. 그리고 그 남자애와 손을 잡고 올림픽공원을 돌고 또 돌았어. 가뜩이나 큰 올림픽공원을 크게 돌고 돌았으니,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야. 아부지가 공원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건 신경 쓸 일이 아니었지. 나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섹시한 남자애 손을 잡고 걷고 있었으니까!


한참이 지나 입을 함지박하게 만들며 차에 올라탄 내게 아부지는 하이파이브를 시도했어. 아부지도 환하게 웃어주었지. "성공했구나?", "누구 딸인데"라는 대화가 그 상황에 부녀지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으나 우린 킥킥대며 웃었지. 그때 아부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에서야 생각해. 덕분에 난 아부지에게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다는,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후로도 성인이 된 나는 남자친구가 바뀔 때마다 아부지에게 이야기했고, 사귀기 전에 썸을 탈 때도 아부지 조언을 구했어. 아부지는 섣불리 조언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지. 잘 들어줌으로써 내가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들었어. 그나저나 20대 시절 내가 아부지에게 한 연애상담은 남이 들으면 참 낯 뜨겁기도 할 거야. 성적인 부분까지 궁금한 게 있으면 나는 아부지에게 물었으니까. 딱히 남사친이랄 것도 없어서 나는 남자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무작정 아부지부터 찾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남자친구가 피임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자는 왜 그렇게 섹스에 목을 매다는지, 섹스 이후 남자의 심리 상태는 어떠한지, 또는 나의 심리 상태는 어떠할지 등등. 아부지는 울컥하거나 긴장하는 기색 하나 없이 조곤조곤 잘 설명해 주었어. 책임감이 있는 남자라면 피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책임감은 성실함이나 상대방을 향한 배려심까지 알 수 있는 태도의 바탕을 이루는 부분이라고 말했지. 섹스엔 남자만 목을 매다는 게 아니라며, 성욕은 사람마다 다른 거라고도 했어. 아부지는 혹시라도 내가 성에 있어서 편견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던 것 같아. 매번 강조했지. 무엇이든 일반화하는 일은 위험하다고 말이야.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저렇다 같은 말에 휘둘리지 말고, 만나고 있는 사람의 고유함과 그 사람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맥락을 한 번이라도 더 헤아려보는 게 중요하다고 했어.


친구들은 어떻게 그런 얘길 아빠랑 할 수 있느냐고 칠색팔색을 했는데, 나는 그런 얘길 아부지랑 하는 게 재밌기도 했어. 실은 그게 나의 자랑이었는지도 모르겠어. 내겐 이런 아빠가 있다는 자부심 같은 거. 남사친보다, 아니 그 어떤 친구보다 훨씬 더 미더운 아빠라는 친구가 있다는.

속 편한 소리다 싶지? 아부지는 엄청난 인고의 시간이었을 텐데. 나도 나이가 들수록 알겠더라고. 아부지가 딸인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면서도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기 위해 얼마나 크게, 무수히 노력했을지 말이야. 나로부터 별별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부지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 어떻게 한 번도 나를 붙들거나 내게 성내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궁금해.


아빠가 딸에게_


그날 너와 함께 올림픽공원으로 첫 고백을 하러 가는 길은 나도 생생히 기억나는구나. 초등학생 때부터 좋아하는 애가 여럿이더니 중학생 때 처음으로 좋아한다던 그 아이는 꽤 오랜 기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던 것인지 수업 시간에 여러 번 눈이 맞았고, 쉬는 시간에 딱 한 마디일 뿐이지만 이야기를 나눴고, 매점에서 서로에게 소시지 빵이나 사이다를 주고받은, 그런 이야기를 너는 내게 쏟아내곤 했지. 너의 방에서, 책상에 놓인 스탠드 조명 하나만을 켜놓았는데도 수시로 발갛게 달아오르던 너의 두 뺨이 선명하기만 했다. 쉬지 않고 조잘대는 입이 얼마나 귀여웠는지도 너는 모른다.


그렇기에, 내내 들어주었지 않았을까 싶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어여쁜 표정을 계속 더 보고 싶었으니까. 대단한 철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만의 교육방식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네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공부를 하라느니, 이성 교제는 안 된다느니 그런 이야기는 애초에 하고 싶지도, 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무서운 건 네가 공부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친구를 사귀어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무서운 건 네가 내 앞에서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자식이 입을 닫고 마음을 숨기는 순간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네 편이어야만 했고, 네 편이 되기 위해선 너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아야 했다.


나 역시 중학생 때부터 술을 마셔보고 담배도 피워봤기에, 그런 일탈이 선생님과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다. 나도 놀 거 다 놀면서 공부했지만, 나름 대학도 가고 졸업 후 첫 취직도 은행으로 잘하지 않았더냐. 청소년기의 일탈은, 어느 정도 자제심만 가지고 있다면 큰 문제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한 번 호기심이 발동하면 성급한 성질에 시도부터 하고 보는 네가 유혹에 넘어갈 때도 있으리라 짐작하곤 했다. 어쩌겠느냐. 그래도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을 자제심은 가지고 있을 거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큰 문제에 휩싸이거나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그때 네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하고 도움을 받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말을 안 하고 마음을 닫는 것이 결국에는 가장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들어주는 일은 쉬웠다. 내게도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남다르게 생각하며 내게서 한 뼘 더 멀어지는 네가 대견하면서도, 한 번씩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붙잡고도 싶었다. 네 이야기를 들으며 알았다. 자식을 키우는 최종 목적은 독립을 시키는 것이라고 하던데, 너는 이미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걸 말이다. 내가 독립을 시키는 게 아니라 너는 이미 스스로 요모조모 따지며 독립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꼭 이야기의 말미에 이 아비의 의견을 묻더구나. "아빠는 어떻게 생각해?" 그리 물어봐 주는 것이 나는 참 고마웠다.


첫 고백을 하러 가는 너를 태우고 올림픽공원을 가던 날, 너는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나와 공동 작전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아빠,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떻게 하지?" 묻곤 했지. 또 나와 함께라서 덜 떨린다고도 말해주었다. 저녁 7시, 드넓은 공원에 너를 데려다 놓는 일이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 그렇지. 지금은 딸아이의 첫 고백길에 함께하고 있는 중대한 순간이구나! 하고 말이다. 나는 너를 막거나 말려야 할 게 아니라 그저 오늘도 내게 고백하러 간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어서 고맙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매번 고마운 건 나였다. 부모로서 고마울 일은 천지 사방에 있었다. 나는 네가 부모인 내게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것 또한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성인이 된 네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은밀한 속내를 꺼내 보이며 궁금해할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가끔 간담이 서늘한 질문을 할 때는 난처하기도 했다. 대체 무어라 서두를 꺼내야 할지 진땀이 났는데, 긴장되지 않아 보였다고 하니 지금은 피식 웃음이 나는구나.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네가 홀로 설 수 있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나 진짜 사랑이란 걸 해보길 바랐다.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다른 사람으로, 더 나아가 세상으로 번져나가기도 하지. 사랑으로 너의 시야를 넓히고 삶의 균형을 찾길 바랐다. 그러니 이젠 알겠지. 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그 시간들은 내겐 인고의 시간이 아니었다.

내 딸이면서도 내 딸로만 존재하는 게 아닌 너를, 시시때때로 변모하는 한 여성을 마주하며 나 역시 배우고, 되돌아보고, 때론 감격스럽기까지 한 시간들이었다. 내게 이야기해 주어, 너의 삶을 나누어 주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