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여름이 다가올 무렵 산책을 하면 초록이 울창한 나무들을 만난다. 모두가 하나의 초록 같지만, 잎마다 조금씩 다른 초록을 품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이 각자의 초록을 산발하는 순간이면 미러볼을 보는 기분이다. 햇살과 나무만으로 삶이 파티가 된다.
나는 세탁소집 딸이다. 아파트 상가에 세탁소가 있어 나는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세탁소집 딸로 통했고, 기저귀를 차고 걷기 전부터 경비 아저씨들의 손에 맡겨져 자랐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나는 라인아파트가 키웠다.
어쩌면 내 사주에는 땅을 상징하는 흙 대신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내 손을 잡고 엄마는 세탁물 배달을 다녔다. 내게 아파트 철문은 늘 익숙하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문이 열리고 나를 본 어른들은 모두 밝게 웃어 주었고, 내 손에 맛있는 과자 하나라도 쥐여주려 했다. 배달을 따라가면 엄마가 사주지 않는 과자를 먹을 수 있었고, 가끔은 배달 간 집에 들어가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놀고 나오기도 했다. 엄마는 애 버릇 나빠진다며 주지 말라 했지만, 나는 아줌마, 아저씨들과 모종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엄마를 피해 과자를 받을 때면 더없이 기뻤다. 그날도 맛있는 간식을 기대하며 한 아파트에 들어갔다.
엄마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손을 잡고 반 층을 올라, 한 집 앞에 섰다. 맞잡은 엄마의 손은 오랜 세월 남의 집 빨래를 하느라 마른 나무껍질 같았다. 엄마가 벨을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배달하러 다니다 보면 가끔 아무도 없는 집을 만나곤 했는데 이 집이 그런 집인가 보다 하고 나는 조금 실망했다. 라인아파트가 아닌 꽤 먼 다른 아파트까지 일부러 따라왔는데.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벨을 더 눌렀다. 더 누를 수록 벨을 누르는 힘은 거세고, 빨라졌다. 엄마는 벨 소리가 빈집을 휘돌아 나올 틈도 없이 다시 누르고 또 누르기를 반복했다. 엄마의 집착 어린 행동이 무서워질 무렵 엄마가 가만히 멈추어 나를 보며 말했다.
“너는 판검사가 되렴. 꼭.”
“판검사가 뭐야?”
“억울한 사람들 한 풀어주는 착한 사람이 판검사야.”
“그럼 나 판검사 할래.”
“그래, 판검사가 돼서 꼭 엄마 같은 사람들 도와줘.”
이 말을 마지막으로 엄마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얼굴을 하고 나무껍질 같은 손을 꽉 쥐고 철문을 쾅쾅쾅 때리고, 단단한 철문에 닿을 듯 얼굴을 붙이며 소리를 질렀다. 처음으로 아파트가 무서웠다. 시멘트가 만들어내는 서늘한 공기가, 단단해서 엄마의 손이 부러질 것 같은 철문이. 그동안 느낀 아파트의 따스함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집은 세탁소가 세 들어 있는 건물주의 집이었다. 그날 꼬박 하루를 그 철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침내 건물주가 나왔을 때 엄마는 나를 앞세워 보여줬다. 나는 엄마의 짐이자 불쌍한 처지를 보여주는 무기였다. 엄마의 거친 손이 내 어깨를 짚고 흔들 때 나는 어린나무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엉엉 눈물이 났다.
그날 이후 부모님은 내게 꿈을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장래 희망을 적을 때까지 판검사가 세글자로 이루어진 하나의 단어라고 생각했다. 서툰 손 글씨로 장래 희망 칸에 또박또박 판검사를 적어 넣었다. 엄마의 한이 엄마를 그렇게 무섭게 만든다면 나는 판검사가 되어 그 한을 풀어주겠다고 생각했다.
더 자라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판검사가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판사와 검사를 합친 단어라는 걸 알았다. 그 뒤로는 판사 또는 검사 중 하나로 적었다. 여전히 부모님은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이후로 나는 장래 희망을 적는 종이를 받으면 아주 곤란했다. 판, 검사가 되려면 좋은 성적이 필요했는데 나는 좋은 성적도 없었고, 건물주와 지루한 소송은 끝이 났다. 우리처럼 어려운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다던 판, 검사는 부모님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게 자리는 겨우 지켰다.
그사이 나는 고등학교에 갔고, 우리 집은 사기를 당했다. 불행이 불행을 먹고 자라듯 자꾸 거대해져 우리를 짓눌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무도 묻지 않는 꿈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 벌벌 떨며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가 평소처럼 ‘엄마 팔아라’, '돈 많이 벌면 시켜 줄게’라고 했다면 나도 더 고집을 피웠을 텐데. 엄마는 ‘네가 하고 싶다는데 엄마가 남의 집 일이라도 해서 시켜줘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봐서 기어이 미술을 하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여름 탓인 것 같았다. 찌는 듯한 더위와 잘 벼린 햇빛과 초록이 자꾸만 나를 할퀴고 베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대학을 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건 그냥 잘 닦인 산책로를 걷는 것과 같았다. 성적보다 높은 곳을 희망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갈 수 있었고, 사정이 어려우니 장학금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대학을 졸업한 후였다. 잘 닦인 산책로가 끝난 것처럼 갑자기 길이 뚝 끊겼다. 이제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라는 데 나는 장래 희망이 없었다. 졸업 후 한두 달 놀겠지 했던 딸이 약 3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자, 엄마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지 않았고, 아빠는 한숨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지난한 여름이 내 삶을 지배했다. 나는 뜨거운 한낮이면 집을 나가 걸었고,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에 집에 돌아와 방에 틀어박혔다. 하고 싶은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김연아는 스트레칭하며 무슨 생각을 하냐고, 그냥 한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생각만 많았다. 아마 생각 하나당 3g쯤 무게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20kg 정도 더 무거웠을 테고, 그만큼 더 중력을 받지 않았을까. 나는 공허와 생각의 중력에 짓눌렸다.
나는 미움이 가득했고, 다양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나의 죽음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 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죽은 나를 발견하는 상상을 하면 도저히 죽을 수 없었다. 미워 마지 않는 그들을 생각해 죽을 수 없다는 게 웃겼다. 차마 죽지도 못하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미워했다. 그중 가장 미워한 것은 나였다. 매일 시간을 죽여 천천히 마르는 방법으로 나를 죽이던 3년의 어느 새벽 나는 미워도 사랑이 된다는 걸 알았다.
혼자 깨어 있는 새벽이면 집이 품은 무의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 통과하고 있는 불행은 낮에는 인내의 가면을 쓰고 침묵했지만, 모두 잠든 새벽이면 가면을 벗고 그 민낯을 드러냈다.
아빠는 밤이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명을 질렀다. 잠이 들지 못 할 때면 한숨을 쉬며 아파트 복도로 나갔고, 잠이 들면 ‘으으으…’ 또는 ‘아아…’하고 비명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부모님을 끝없이 미워하면서도 비명 같은 신음이 들리는 날에도, 그 신음마저 들리지 않는 날에도 이러다 부모님이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그럴 때면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가 잠든 부모님의 옆에 앉아 몸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통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 날이면 갈비뼈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오르락내리락 폐의 움직임을 따라 숨을, 삶을 느꼈다. 숨을 쉬는 것에 깊은 안도가 밀려왔다.
미운 그들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워도 사랑이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미워했던 부모님을 사랑해 내고, 꿈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내 몸에 쌓인 미움을 털어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같은 꿈을 꿨다. 내가 긴 언덕을 오르고 있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몸이 밀려나는 기분이 들어도 나는 언덕을 오른다. 언덕 끝에 나는 누군가와 만나 손을 맞잡았다.
꾸고 나면 이상한 감정이 드는 이 꿈을 나는 내 마음대로 해석 하기로 했다. 언덕 끝에서 만난 것이 나라고. 나는 나와 만났다고.
“네가 이 언덕을 올라 만난 것이 나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 다행이야.”
다시 여름이다. 매일 나를 베는 것 같았던 햇빛과 초록이 이제 미러볼이 되어 내 삶을 파티로 만든다. 삶이 이리도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