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찾는 정체성

정체성은 매일 쓰는 언어의 실험실

by 이서언


“말이 트이기 전까지

내 정체성도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다.”


언어는 나에게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영향으로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꽤 이른 나이에 혼자 유학을 떠났다.

내가 쓰는 말은 곧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유일한 입장권이었다.


말투 하나, 억양 하나,

“나는 이 세계에 속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끊임없이 점검하게 했다.


어쩌면 부모님과 함께 이민을 떠났다면

조금은 나았을까.

적어도 외로움이나 혼란 같은 것들은 덜 겪었을까.

아마도 이 질문이

그렇게 이른 나이에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pisode 1

| 받아들여진 듯, 그러나 여전히 낯선 나


미국 생활에 조금 익숙해져 갈 무렵,

가족이 나를 보러 왔다.

도심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아침.

나는 조식당에서 가족의 식사를 대신 주문했다.

어색하지 않게 응대했고,

종업원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영어 정말 잘하네.

여기서 자란 애 같아. 언제부터 배운 거야?”


그건 분명 칭찬이었다.

하지만 내겐 이렇게 들렸다.

‘넌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잖아?’


그 순간, 내 옆에 앉아 있던 가족들—

영어를 하지 못하시는 그들의 다정한 미소와

종업원의 말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나는 이곳에서 살고 있었지만,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가 “영어 잘하네”라고 말할 때마다

그 말은 나를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경계 밖에서 바라보는 말처럼 들렸다.



Episode 2

|도쿄의 화려함 속에 묻힌 고요한 나


일본에서의 대학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항상 목소리의 볼륨을 낮추고,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상대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친한 일본인 언니가 내게 말했다.

“너는 되게 상냥하고 조심스럽고,

카페에서도 늘 주변 살피잖아.

가끔은 일본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 말은 다정한 인상이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

나는 나인데, 나로

충분하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본인 같다’는 말은

내가 어떤 틀에 맞아야 한다는

기대처럼 느껴졌고,

그 기대는 소속과 경계 사이에 나를 또 세웠다.


나는 본래 조심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이 사회에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언어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고,

또 끊임없이 물어왔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 안에서

다시 말하고, 다시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정체성은 어떤 선언이 아니다.

어느 세계에 속하고 싶은지,

어디까지 나를 내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매일의 조심스러운 실험에 가깝다.



우리는 모두 말 안에서

자신을 조심스럽게 다듬어간다.


그리고 말이라는 도구를 통해


타인을 만나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을 거울처럼 다시 마주한다.


언어는 결국,

내가 누구인지 계속 묻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지금,

모국어로 소통하며

나를 보여주는 이 순간의 물음표들은

더 깊고 더 넓어질 때가 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기에,

가끔은 외국어를 배우던 때보다

더 큰 벽과 언어의 차이를 느끼기도 한다.


같은 나라 사람이

모국어로 말을 나누는데도

오해가 생기고, 서운함이 피어나며,

때로는 내 뜻보다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듯,


어릴 적 느꼈던 내 정체성의 질문은

단지 ‘해외 생활’이라는 배경에서 피어난

조금은 이른 물음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이 물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외국어를 공부하며

마주하는 신비로움과 새로움,

미지에 대한 궁금함 역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다.



오늘의 노트


언어는 나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 당신은 어떤 순간에,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닌가?’라고 느껴본 적 있나요?

• 지금 당신이 쓰는 말은,

정말 당신의 언어인가요?

• 우리는 왜, 어떤 말에는 안도하고,

어떤 말에는 상처받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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