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되갚는 선택, 그것이 진짜 옳은 방향일까.

Is Repaying Evil Truly the Right Choice?

by 지누리즘

우리는 너무도 쉽게 “당연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한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그만큼 되돌려주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먼저 맞았으니 나도 때려야 하고, 먼저 속았으니 나도 속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감정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이다.
어쩌면 동물적인 반응에 가깝다.
위협에 대응하고, 공격에 반격하는 것은 생존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다.
단순한 반응을 넘어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묻는 존재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갈림길이 생긴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 선택이, 정말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인가.
아니면 그저 감정에 끌려가는 반응인가.
우리는 사람을 쉽게 단정한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악인이다.
그리고 그 판단 위에서 미워하고, 되갚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 단지 드러난 한 단면일 뿐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환경과 관계, 쌓여온 감정과 상처,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짧게 보고 깊게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곧바로 감정으로 이어지고,
감정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악을 악으로 되돌려주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가 만든 방식,
상대가 던진 감정의 흐름 속으로
내가 그대로 들어가 버린다.

결국 나는 묻게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내어주라는 말.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라는 말.
이 말은 단순한 희생이나 약함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대의 행동에 따라
내 기준을 흔들리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너의 폭력에도
나는 폭력으로 답하지 않겠다.
너의 탐욕에도
나는 같은 방식으로 물들지 않겠다.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진다.
집착을 내려놓고,
미움에 머물지 않으며,
흘려보내는 것.
내어준다는 것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붙잡혀
내 삶을 소모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결국 이것은
상대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철저히 나를 위한 선택이다.


우리는 종종
정당함이라는 이름으로
분노를 붙잡고 살아간다.
그 사람이 먼저 했기 때문에
나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시간,
되갚을 이유를 정당화하는 시간,
그 감정 속에 머무는 에너지.
그 모든 것은
내 삶에서 빠져나간다.


짧은 인생이다.
좋은 것을 하며 살아가기도 부족한 시간이다.
좋은 사람과의 관계,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가고 싶은 길에 집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하다는 이유로
그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래서 용서라는 선택이 등장한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단지
그 사람에게 묶여 있던
나의 시간을 끊어내는 것이다.
더 이상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흔들리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그 사람을 머릿속에서 내려놓고
내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누군가를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금 더 넓어진 나를 만난다.
좋은 사람에게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 앞에서도
내 기준을 잃지 않는 상태.
그것이 어쩌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성숙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쉽다.
하지만 악 앞에서도
나의 방향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더 가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이다.


그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장 깊은 기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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