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꼭 이렇게 침대 신세일 때만 날이 좋지.’ 좀 전에 간호사 선생님이 새로 꼽아주고 간 주삿바늘이 따끔거렸다. 그렇게 한참 멍을 때리고 있는데, 옆 침대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승연 엄마, 오늘은 승연이 안 와?”
유난히 승연이를 아껴주시는 분이었다.
“네, 오늘은 오지 말라고 했어요. 다음 주가 걔 학교 시험이기도 하고. 공부나 하라고.”
“으응, 요즘 시험기간이구나. 얼굴 못 봐서 아쉽네.”
“아마 내일 모레나 한 번 오긴 올 거예요.”
문득 영자는 지난번 스쳐 지나가듯 아주머니가 한 말이 기억나 말을 이어갔다.
“근데 저번에 승연이가 누구 닮았다고 하셨었죠?”
“응, 그랬지. 왜 전에 나 해사동 써니마트에서 일했었다고 했잖아. 그때 같이 일하던 야채 코너 동생 딸이랑 너무 비슷하게 생겼어.”
“아, 맞다. 그러셨었지.”
해사동. 써니마트. 야채 코너.
영자는 이 세 단어에 이유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기억은 나질 않는데, 마음에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엄마, 가스불이 안 켜져. 나 라면 먹고 싶은데.>
<가스 밸브 열었어?>
<어.. 아니?ㅎㅎ 해결했어. 잘 자~ 내일은 병원 갈게.>
<그래. 야 라면 먹고 가스 밸브 다시 잘 잠가. 참 지난번에 베개는 고맙다 딸. 잘 베고 있어.>
<별말씀을>
그날 밤 영자는 승연과 문자를 주고받다 불현듯 전에 승연이 물어봤던 5층 통로가 생각났다. 승연 앞에선 모르는 척 했지만 실은 영자도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승연이 거길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영자는 마음이 영 불편해졌다. 떠올리면 마음이 외로워지는 곳. 영자에게 5층 통로는 그런 곳이었니까.
뱃속에 승연을 데리고 있던 시절, 영자는 5층 은주네에서 종종 밥을 얻어먹었다. 그 몸으로 밥 차려 먹기 힘들지 않냐며 은주네 엄마가 알뜰이 챙겨준 덕이었다. 일주일 간 심한 입덧을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던 그날도, 영자는 은주네로 향했다. 따뜻한 쌀밥에 김치 한 조각 올려먹는 걸 상상하니 입맛이 다시 도는 탓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몸을 이끌고 5층에 도착했을 때, 영자는 처음 보는 문을 만났다. 하지만 영자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원래 있던 문을 지금 봤겠거니 하며 은주네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 그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영자는 놀라서 고개를 돌아봤다. 문에서 영자보다 10살 정도 어려 보이는 여자와 작은 꼬마 아이가 나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그 여자는 영자보다 더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꼬마 아이를 돌려세워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잠시만요.”
영자는 닫히려는 문을 세운 채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걸어가던 여자와 어린아이가 뒤를 돌아봤다. 영자는 그렇게 그 복도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영자는 훗날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그게 다 호르몬 탓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승연을 뱃속에 데리고 있는 나머지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 같은 그 여자를 봤을 때 절로 손을 뻗게 된 것이라고. 그 감정이 동정이었는지 연민이었는지 아니면 같은 처지인 사람에 대한 위로였는지는 모르겠다고.
아니나 다를까, 그때 그 여자는 아픈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병원 신세를 져서 집에 빚이 많이 생겼고, 남편은 어느 날 아침 일을 하러 간다고 하더니 돌아오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날도 여자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일을 하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이가 유난히 병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통에 시간이 늦어져 몰래 그 문으로 나오려 했다가 영자를 마주친 것이다. 낮에는 써니마트 야채 코너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감자탕집 설거지 알바를 한다던 그 여자는 살갗이 벌게진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여자일까? 써니마트 야채 코너에서 일한다고 했었는데. 근데 그 꼬마애가 우리 승연이랑 닮았었나.’ 영자는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던 그 여자를 옆 침대 아주머니도 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왜 여기 살아요? 여기가 어디예요? 오늘 처음 봤는데.”
“아, 여기는 경계예요. 검은 세계와 현실과의 경계. 어느 날 집으로 편지가 왔는데 여기 살면 월세는 안 내도 될 것 같아서. 사실 검은 세계로 완전히 갔으면 우리 애도 아픈 게 좀 덜하고 저도 편하다고는 했는데 제가 좀 미련이 남아서. 저 아직 젊거든요. 어릴 때 얘 낳고 병원비 벌려고 살았더니 예전에 제 삶이 기억이 안 나서요. 사실 우리 애 위해서는 검은 세계로 가는 게 맞았는데, 제가 제 삶을 좀 기억하고 싶어서. 그래서 여기 오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이러고 사네요.”
영자는 그날 한기가 가득한 그 복도에서 여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여자는 지금쯤 검은 세계로 갔을까? 옆 침대 아주머니가 못 본 지 오래되었다고 했으니, 써니마트 일은 그만둔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그 여자가 말했던 검은 세계로 가는 게 더 행복한 길이 맞긴 맞는 걸까. 거긴 대체 어디일까. 영자는 승연이 그 복도에서 여자를 마주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했다. 혹여나 마주쳤다면 그 여자 옆에 승연을 닮은, 아주 건강해 보이는 딸이 함께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