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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day Nov 15. 2020

고생이 그냥 생고생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다양한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삶은 고행이요, 생업은 의무다'라는 말도 있다. 부처님도 삶은 계란이 아니라 고통이라 하셨다.


대학교 방학 때, 다양한 알바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알바는 '택배 상하차'였다. 택배 상하차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집으로 뿌리기 위해서 트럭에서 트럭으로 택배를 옮기는 작업이다. 더 쉽게 말해 택배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작업을 계속하는 일이다.

 택배상하차의 시작시간은 저녁 6시다. 밤새 일하고 새벽 5시에 퇴근한다. 새벽 2시쯤 식사를 주고 휴식을 취하는데, 밥이 그렇게 꿀맛일 수 없다. 아르바이트비는 그 당시 6만 원으로 몸이 힌든 것에 비해 많이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알바는 당연히 아니며,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일할 수 있었다.

 트럭이 후진으로 다가오면 기다리고 있다가 운전기사분이 문을 열어주면 레일을 넣는다. 그리고 안에 있는 물건을 빼면 된다. 굉장히 단순한 작업이다.

 1시간은 족히 한듯하여 시계를 본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확히 15분이 지나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도망가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걸 어떻게 8시간을 더하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심지어 같이 일하는 옆 사람은 자신이 조폭 생활을 하고 왔다며 무용담을 들려주는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어서 듣는 것이 고역이었다. 귀에서 피가날 지경이었다. 조폭 당시 앞니가 다 나갔는데 돈이 없어서 임플란트를 못했다고 한다. 씩 웃는데 정말 앞니 4개가 깔끔하게 없었다. 무서워서 '그만 좀 말하시면 안 될까요?'가 목구멍 뒤로 쑥 넘어갔다.



점점 요통이 심해지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생고생이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택배 상하차는 정말 생고생 중에 생고생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생고생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 내가 지금 이 행동을 하고 있는 이유와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근육을 엄청 쓰니까 몸이 좋아지지 않을까? 땀 흘려 번 돈이니 돈의 소중함을 깨닫지 않을까? 누군가는 택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산타 할아버지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까? 대한민국 물류산업에 조그맣게 이바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몸은 고되지만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평생 일하시느라 힘드셨겠다'라는 생각도 들어 괜히 눈시울이 붉혀졌다. 물론 그 감동은 허리 통증 때문에 금방 사라졌다. 힘든건 힘든거니까...


 생고생이 생고생으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고통은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복근의 고통은 배에 왕자를 만들고, 달릴 때 폐를 찌를 듯한 고통은 심장과 폐를 건강하게 만든다. 육체적인 고통은 육체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든다.


직장선배의 지도 조언(갈굼), 친구의 오지랖, 남자 여자 친구의 잔소리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깊게 만들어주고, 포용력을 넓게 만들어 준다. 정신적인 고통도 자세히 보면 우리를 좀 더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삶의 의미를 질문하지 말고, 내 스스로 의미를 만들고 찾아야 한다.



 고생이 그저 생고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빠르게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도 말했다.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 나는 운동을 할 때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강해지려고!'라고 답한다. '강해지면 뭐하게?'라고 물으면 '강해져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라고 답하고 싶다. 내 몸도 약하면 돈도 못 벌고, 남한테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 당연히 내 주변 사람들을 챙기지 못한다.

 주변 사람 때문에 힘들면 '그래, 뭐 같지만 그래도 내가 선배 됐을 때 저 사람처럼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면서 그 직장선배 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덕분에 저런 놈도 있구나라며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며 나의 인내심도 한층 깊어졌다.



삶의 의미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사회와 국가 그리고 나 자신에게 기여하고 있는지 찾고, 힘들고 고생스러울 때마다 이 행동으로 하여금 행복해하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내가 만들고 있는 이 제품 덕분에 누구는 좀 더 편한 생활을 누릴 것이며, 내가 쓰고 있는 글 덕분에 누군가는 웃음 짓지 않을까?처럼 가볍게 의미를 찾으면 된다.



 의미를 밖에서 찾으면 영원히 못 찾는다. 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줘야 한다. 그래야 고생이 생고생으로 끝나지 않고, 뿌듯함과 자부심으로 내게 다가올 것이다. 아무런 의미 없는 고통은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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