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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day Mar 21. 2020

우리가 하나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이유.

사회에 나가서도 학교 버릇은 못 고쳤다. 나는 욕심부리기를 좋아했다. 무조건 계획은 무리하게 잡았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재테크 공부도 하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게 섹시하게 보여 중국어 학원도 등록했다. 자격증도 하나 따면 좋을 것 같아서 한국어 강사 자격증도 준비했다. 그 와중에 몸도 좋아지고 싶어서 헬스도 꾸준하게 갔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해서 책도 꾸준히 읽었고, 가끔씩은 그림도 그렸다. 문득 뇌리를 스친다.

'맞다. 내 인생도 24시간이었지...'



지금 이렇게 차분하게 내가 한 일들을 써보니 왜 제대로 하나 끝내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기본적인 시간 확보조차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결과만을 원했다. 하루는 24시간인데 혼자 48시간 계획을 잡았다. 그럼 내가 왜 그랬을까?  항상 계획이 무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왜 스스로를 놓아주지는 못했을까.. 왜 하나에 집중하지 않고, 이것 저것 손을 대서 결국 하나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을까.




이유는 ‘남을 의식하는 마음’때문이다. 내 인생의 만족과 행복의 기준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멋있다, 와 잘한다. 부럽다.라는 말 한 번 듣겠다고,  스스로 보이지 않는 줄로 나를 칭칭 감고 있었다. 줄을 조이니 점점 숨은 차오르기 마련이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우울해진다. 일의 능률도 줄고, 출근하기도 싫어진다. 출근을 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온종일 딴생각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제쳐둔 채, 네이버를 돌아다니고,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읽는다. 축구 동영상을 본다.


 어차피 집에 가면 내가 열심히 할 것은 따로 있으니까... 퇴근 후에는 열심히 살 거니까....


출근 중에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한다. 눈은 뻑뻑하고, 어깨는 뭉다. 웃음기는 점점 사라져 간다. 아니, 일부러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 일에 집중하게 되면 그만큼 내 에너지와 체력을 뺏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들 것만 같았기 때문에 무서웠다.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이러한 이유 '행복의 기준, 좋음의 기준, 만족의 기준'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나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남이 좋다면 좋다는 것이고, 남이 별로다라고 하면 별로인 것이다.


 이렇게 되선 안된다. 나 스스로 좋음과 싫음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한없이 인색하다.  





 부모님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잘 물어보지 않는다. 미술이나 음악 같은 것은 대학 들어가서  찾아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대학에 들어가서  마시다 보면 군대 들어가야 하고, 군대 다녀온 후에는 취직을 준비해야 한다. 쌓아놓은 스펙도 없다. 멋이라곤 없다. 남들에게 내가 무슨 일 하는지 당당하게 말하기 민망하다. 내 욕구는 잠시 접어둔다. 대신, 부모님이 좋아라 하는 대기업에 원서를 넣는다. 또 떨어진다. 괴롭다.. 반복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남의 것에 기웃거리게 된다. ‘남의 인정’만이 나의 유일한 해소제가 된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이유는 ‘한 가지’에 미친 듯이 집중해서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와 변명은 다양하다. '내가 미친 듯이 했는데 그게 내가 정작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떡해요.. 한 가지를 모르겠는데요... 그 한 가지 알았으면 벌써 저도 미치고도 남았죠.. 미친 듯이 집중한다는 것이 뭔데요... ㅜ'



 리가 끝까지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욕심도 욕심이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나마 좋아하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눈앞에 해야 하는 것들, 그것도 아니라면 남에게 도움되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남에게 도움되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최소한 봉사는 끝나고 보람은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대부분 의미가 있는 것이고, 인간은 남을 돕는데서 큰 행복을 느끼게 되어있다.


본인은 미대를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부담을 주기 두려워 포기했다. 그때 벌써 삼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부모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포기한 것은 변명이었다. 아니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미술로 승부를 보면 질 것 같은 불안감에, 좋은 미대를 가려면 피나는 노력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귀찮음에, 그만큼 성적이 안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한 것이다. 그 무게에 짓눌려 포기한 것이지. 부모님을 판 것은 보기 좋은 핑계였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편한 거짓말이었다. 가장 숨기 좋은 도피처였고, 나 스스로도 이해됐다. 나이가 서른이 다되어가니 이제서는 인정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이걸 깨달은 덕분에 나는 아이패드를 샀다. 붓을 들었다. 지금부터라도 자아실현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는가...



우리는 목표를 세운다. 목표가 크건 작건 누구에게나 조금의 목표는 있다. ‘평생 놀고먹고 싶다. 영어를 잘해야겠다. 카페를 하나 차리고 싶다. 건물주가 되고 싶다... 복근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편해 보이는, 남들이 추천해주는 다른 길을 간다. 그 길의 끝에는 왠지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어떤 일이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임계점’을 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순간은 무조건 온다.


세상은 더 좋게 변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레벨이 높아져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세상이 더 좋아 보일 뿐이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표를 이루고 나서 그 기쁨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목표 지향적인 사람보다 존재 지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추천한다. 목표지향적인 사람은 목표만 집중하는 바람에  과정도 놓치고, 사람도 놓친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또 다른 목표에만 매달린다. 결국에는 큰 만족도 없이 갈증만 남는다.  계속 갈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런데, 행복은 목표 끝에 있는 게 아니다.



꼭 그렇게 조급하지 않더라도 살 수 있다. 계획대로 안된다 해도 별 일 일어나지도 않는다. 남에게 뒤처지는 느낌은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다른 말로 기우라고도 한다.

이제부터는 계획 세우지 말고 그냥 좀 하자. 머리 굴리지 말자. 우리가 하나를 끝내지 못한 이유는 다양하다.

한 가지만이라도 잡고 천천히 해보자. 남 신경 좀 제발 그만 쓰고! 계획 세우느라 시간 때우기보다는 일단 몸을 움직이자.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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