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너무 무겁고 세상은 너무 어렵다.
말은 너무 무겁고 세상은 너무 어렵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다. 왜인진 몰라도 내 말수가 점점 줄고 있는 듯한 기분이 자주 든다. 할 말이 없어진다기보단 내 안에서 곱씹는 과정이 길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반해 다른 친구들은 쉴 새 없이 재잘댄다. 어떻게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대화라는 건 몇 초안에 생각해서 내뱉지 않으면 어색해지거나 맥락이 흐려지기 마련인데 난 적어도 1분은 걸리지 않나 싶을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대화를 듣기만 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도 같다. 이것도 약의 부작용일까.
아마 어설프고 주관적인 자가 진단으로는 심리적인 영향이 큰 것 같다. 어느 순간 말이 너무 무겁다. 저렇게 쉽게 뱉으면 안 될 것만 같고 저렇게 가볍게 휘두르면 안 될 것만 같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말을 해야 할 적절한 순간을 놓치게 되고 집에 가면서 괜히 곱씹게 된다. 혹은 "왜 저렇게 말을 쉽게 하지?"라는 생각에 괜히 상대방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은 꼭 어딘가 기분 좋지 않은 찝찝함을 남긴다. 내가 하는 고민의 반에 반이라도 했으면 저렇게 말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저렇게 조악한 말을 뱉어 놓고는 멋쩍게 웃어넘기다니. 비겁하지 않은가? 한심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너무 오만하다.
그러다 보니 이젠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는 사람이 더 좋아지기도 한다. 각자 커피 한 잔씩을 사이에 두고 그저 눈빛으로만 감정을 공유하는 이 순간이 소중하다. 때론 말보다는 비언어적 수단이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그동안 어색해 어쩔 줄 몰라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고 하면 변태 같을까. 그래도 분명한 장점이 있다. 가벼운 웃음으로 소비되는 개똥철학과 농담들도 좋지만 그것들에 가려 꽁꽁 숨겨놓은 상대방의 수심. 걱정. 불편함들을 찾게 되면 그 사람의 근황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들만 보이는 건 아니다. 기분 좋은 일들이 보이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지 않은가. 찾아지는 보물에 따라 내 마음속 말들과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쓰다듬을지 고민하게 된다. 그것이 날카롭고 사려 깊지 않은 말들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내가 말을 잘하지 않고 대화에 뛰어난 사람이 되진 못할지언정 상대방에게 찝찝함을 남기진 않겠다. 적어도 이 다짐은 지키려 한다.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그렇게 가벼운 대화에서도 하고 있으니 말이 너무 무거울 수밖에.
세상이 어렵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김연아의 명언이 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운동을 하냐는 질문에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라고 답을 했다. 이 말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땐 그것만 바라보고 그 외 불필요한 생각들은 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안된다. 목표는 없는데 생각은 많아서 그런 걸까. 목표는 왜 못 잡고 있을까.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반려자와 함께 좋은 차를 끌며 내 노후까지 함께 할 자식들과 함께한다면 너무 좋겠지. 그런데 그것만을 위해서 무작정 달려가는 게 나는 너무 힘들다.
연애부터 결혼을 하려면 살도 빼고 자기 관리를 하며 돈을 모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렇게 모인 돈은 집을 마련하기 위한 대출의 씨앗이 될 거고 그렇게 마련한 보금자리는 상환이라는 족쇄가 된다. 그렇게 대출도 갚으며 아이들 식비에 생활비에 학원비도 보태는 삶을 보내게 되겠지. 이게 의미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다 의미가 있으니까 전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심지어 나도 그런 삶을 꿈꾸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도 나에겐 이게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저 삶을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게 내겐 너무 어렵다. 아직도 제대로 찾지 못한 "내"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너는 미래의 아내가 담배를 피우거나 문신이 있으면 괜찮냐더라. 나는 사람 됨됨이가 중요하지 그게 정말 중요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외부의 시선도 중요하다며 그건 사회적으로 힘겨울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집을 사려면 얼마를 모아야 하며 어떤 투자를 하고 어떤 대출을 하고 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래야 사회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왜 이게 평범한 거지?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인간성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폭력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요소가 있지 않은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외적인 행동만이 고려되었다. 집도 사실 내 몸을 뉘일 수 있고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일 텐데 그것보단 내 차가 어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지만 고려되었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어떤 행색을 갖추고 있는지보단 내 침묵과 공상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집도 으리으리한 아파트도 좋겠지만 그것보단 내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더 중요한 기준이다. 남들 시선 때문에 무리해서 구입한 탓에 카푸어나 하우스푸어처럼 사는 게 더 싫다. 아니 근데 그 이전에 난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부터가 너무 힘들다. 당장 눈앞에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쌓여있는데 어떻게 벌써 저런 것들을 고려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심지어 기준을 내가 아닌 타인에 두고서.
징글징글하다. 살아간다는 건 너무 징글징글하다. 알베르 카뮈는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던데 그게 이런 기분인가. 삶은 살아갈수록 뜻깊은 축하나 의미보단 부조리와 어긋난 이치를 더 많이 보여준다. 그렇기에 도전과 시련 앞에서 한 없이 나약하게 무너지기만을 반복할 뿐이다. 이건 나만 아는 게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살아간다. 심지어 열심히 살아간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게 쉬워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처음인 삶이라지만 나는 더 초보가 아닐까 싶다. 무언갈 빨리 배우는 사람들은 뭐라도 능숙하게 해내던데 나는 그런 편은 아닌가 보다. 아직도 나는 어렵다. 말은 너무 무겁고 세상은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