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넘어섬 26화

돈이 부리는 꼭두각시 놀이

돈, 자존심, 도덕, 양심, 권선징악

by wordsfromulsan

사람은 어디까지 뻔뻔할 수 있을까? 인간은 사회 속에 살아가며 그 안의 규칙에 따라 도덕과 수치심, 해도 되는 것들과 하면 안되는 것들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지 않는가?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정도만 다를 뿐 어느 정도는 다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주 내가 마주한 상황들은 이런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고 양심을 개나 줘버릴 수 있을까. 정말 내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상황들을 마주했다. 정말로. 개새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와중에 고민하게 되는 현실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느끼게 되었다.

뭐 당연하게도 이 상황들은 전 직장으로 부터 발생했다. 내가 제출한 임금 체불 관련 자료들은 검찰로 이관되었다. 그 사이 대표와 재무부장은 노동청에 조사를 받고 왔다. 그 뒤엔 갑자기 재무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간이대지급금이라도 받으려면 우리는 민사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달 받았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나를 당황케 했다. 회사가 어려우니 돌아와줄 수 없냐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헷갈렸다. 내가 임금을 받았던가? 아니 임금을 받았다 쳐도 그게 제 때 들어왔던가? 그 사이에 내가 사과를 받았던가? 이건 분명 나한테 큰 잘못을 한 거 아닌가? 당장 재판을 진행해야 되는 게 지금 상황 아닌가?

심지어 이 말은 재무부장의 아이디어도 아니었고 부사장의 생각이었다고 하던데 왜 직접 말하진 않은 것일까. 돈도 못줘서 당장 재판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세도 일말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 와중에도 새로운 인원은 뽑지 못하고 뽑아 놓고 새로 가르치기엔 시간이 아까우니 원래 하던 사람이 편하다고 생각했겠지. 월급을 포함한 거래처 대금, 세금 등을 못내서 망하기 직전이니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미루거나 마무리 지을 사람으로 나를 선택한 것일까. 근데 이걸 내 어려움은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인걸까.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 다음 날은 더욱 심각했다. 재무부장은 어차피 본인도 월급을 못받았는데 빨리 받는 게 중요하니 간이대지급금을 받는 방향으로 가자고 했고 그 과정에서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는 것보단 노무사와 변호사를 대동하는 게 훨씬 빠르다고 했다. 노무사 비용은 월급을 받은 후 10%를 지불하면 된다고 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비록 아직 회사에 소속된 사람이 퇴사자를 위해 움직인다는 게 다소 찝찝한 부분이 있었지만 돈을 빨리 받는 게 좋으니 넘어가자고 생각했다. 그 뒤 이어진 말은 변호사 비용은 회사에서 받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이 탐스러운 독사과를 닮은 말같아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의심은 빗겨가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의 조건은 딱 하나였다. 처벌 불원서를 써주는 것이었다.

처벌 불원서라니. 내가 지금 그들을 얼마나 혐오하고 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류에 내 이름을 쓰라니. 난 심지어 정신적 피해보상 금액까지도 가능하다면 청구하고 싶었는데 그런 소릴 들으니 정말 화가 났다. 미안하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어떻게 처벌을 하지 말아달라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정말 끔찍하게 증오스러웠다. 이것과 관련해 근로감독관과 통화를 했더니 직접적으로 알려주진 않았지만 이전에 비슷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피해간 듯 했다. 그러니 근로감독관으로서 강요할 순 없지만 이 녀석들은 아마 이번에도 이런 식으로 처벌을 피하려는 듯 하니 쓰지 않는 것을 권한다고 했다. 재무부장에게도 다시 물어봤다. 이게 윗 선의 생각아니냐고 한번 더 물었더니 이건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했다. 이것조차 놀라웠다. 본인도 체불 당한 입장인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논리는 이러했다. 변호사 비용은 회사에 청구할 건데 처벌 불원서도 안써주는 사람의 비용을 대주겠냐는 것이었다. 또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니 본인을 봐서라도 한 번만 써달라고 간곡히 내게 부탁했다. 이성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진 알겠지만 공감할 순 없다는 말로 마무리 짓고 통화를 종료했다.

고민이 많이 깊어졌다. 그냥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받을까. 왠지 처벌 불원서를 써주는 게 내가 지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도 돈 앞에서 무릎을 꿇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들이 이번에도 잘 넘어갔다며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혹여 내가 이번에 써주면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기는 건 아닐까. 정말 처벌을 안받아도 되는 걸까. 가능하다면 콩밥이라도 먹이고 싶은데. 정신적 피해보상도 가능한한 크게 요구하고 싶은데. (이는 병원에서 상담해본 결과 상급 기관에서 진행해야 하고 이에 따르는 비용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내 손으로 처벌 불원서에 서명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다음 날 재무부장은 내게 한번 더 전화를 걸었다. 개인적으로 진행하게 되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빠르게 진행하려면 변호사 비용도 지불해야 되는데 그 비용이 절대로 적지 않으니 그냥 이번에 할 때 같이 하자고 했다. 처벌 불원서까진 안써도 같이 할 수 있도록 도와 줄테니 같이 하자고 한다.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나는 처벌 불원서 없이 그 사람들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면 쓰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도 돈을 빨리 받을 수 있으니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걸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돈이 정말 많았으면 이런 고민 안해도 됐을텐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 내가 정말 돈 앞에서 쓸 데 없는 자존심을 부리는 걸까. 정말 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만 같은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keyword
일요일 연재